2014, 박영택

박은하-주변부 삶에 대한 필경사로서의 그리기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박은하의 그림은 대담한 구상미술이다. 커다란 스케일감각이 압도하고 화면 안에 자리하고 있는 복잡한 내용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크고 집요하고 비장하다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이런 느낌은 작가가 그림에 부여하는 모종의 의도에 따른 것일지도 모른다. 본인이 크게 감동받았거나 절실히 느낀 것, 그래서 전달하고 싶은 것을 그만큼 정성껏, 절실하게 그렸다는 의지가 묻어난다. 박은하의 모든 그림은 특정 장소, 장면, 상황을 전달하고자 하는 배려에 우선한다. 그것은 메시지가 있는 그림이자 뜨거운 문장 같은 그림이다. 그러니까 작가는 자신의 삶의 반경 속에서 문득 발견한 것, 마주친 현실에서 피할 수 없이 접촉한 것을 소재로 한다. 그것은 이 사회가 어떤 것인지를 본인이 직관적으로 발견한 장면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대부분 어둡고 비관적이며 불길한 것이다. 이 서사적인 구상화는 지독한 그리기와 시각적인 충격, 그리고 화면 내부의 맥락을 순식간에 허물어버리는 액체성 물질의 연출로 자리하고 있다.
 
작가는 한국이라는 자본주의사회의 본질, 또는 치열한 생존경쟁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 그들의 불안과 권태와 공포를 그림으로 그리고자 한다. 물론 이는 단지 한국에만 해당하지는 않는다. 여행길에 접한 이국의 삶의 현장에서도 유사한 장면을 목도한다.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생을 연명해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에게는 거의 유일한 관심사다.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림 안에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지닌 가난, 불안, 공포, 소외 등의 감정이 착잡하게 번져나간다. 작가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겪는 생의 고통스러움, 혹은 체제에서 거세되어진 변방의 현대인들, 체제에서 배제된 아웃사이더들의 모습을 주밀하게 관찰하고 이를 세밀하게 기록했다. 사무실, 카페, 도심 속의 다양한 현대 사회 공간 속에서 두려움을 지니며 생존을 모색하는 이들이다. 작가는 필경사처럼 그림을 그렸다. 그들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그 역시 이 가혹한 자본주의 체제 밖에서 살아가는 잉여적 존재로서의 심리적 소외를 지녔기에 그러한 장면을 주목한 것 같다. 작가는 단지 관찰과 주목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삶과 상황을, 감정을 묘사하고자 하며 이는 결국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니 박은하의 작품은 결국 자신의 내면의 풍경화인 셈이다. 자신과 동일한 운명들에 대한 애정과 애도의 감정이 짙게 묻어있다고도 하겠다. 그러니까 그림의 내용은 평소 본인의 느끼고 인식하고 있는 이 사회시스템이 지니고 있는 모순과 그에 대한 불편함, 자신의 삶의 경험을 힘껏 이미지화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힘껏의 힘과 가득 채워놓고자 하는 강박이 그림의 기본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커다란 그림은 보는 이의 육체를 화면 안으로 수렴시킨다. 관자의 눈앞에 가득 펼쳐준다. 그래서 특정 상황과 홀로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 이 장소에서 이런 상황을 직접적으로 목도하고 있다는 그런 관찰자의 기분이 절로 베어들게 한다. 눈을 떼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작가는 분명 회화의 힘과 충격에 대해 고려하고 있었던 듯하다. 작가에게 그림이란 충격, 감동, 공감을 주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림은 다분히 설명적이고 일러스트레이션과 유사한 편이다. 장면을 설정하고 인물을 배치한 후 전체적인 분위기를 강조한 후에 그 위로, 주변으로 기이한 형체를 지닌 부유물(일종의 마블링)을 그려 넣는다. 그것들은 떠다니고 갑자기 분출되면서 정적인 화면을 혼돈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인물의 내면, 정신 혹은 비가시적인 그 무엇이 밖으로 유출된 듯이 보이게 만든다. 아마도 이 액체성, 유동성 물질의 개입과 침투가 이 작가 그림의 흥미로운 특징이고 변별성을 지닌 것으로 많은 이들에게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 유동적인 흐름을 보여주는 형상을 플라나리아(플라나리아는 재생력이 강하기로 유명한 생명체를 지칭한다. 진화가 덜 된 이 편형돌물은 아무리 잘라도 회복하는 능력으로 인해 거의 불멸에 가까운 존재라고 한다.)와 유사한 것으로 그려내고 있다. 플라나리아의 무서운 생명력과 재생력은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 자본주의시스템의 본질과 매우 유사한 지점에 있기에 은유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욕망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고 그 시스템 아래 길들이고 조종하는 한편 결코 그 어떤 것으로도 멈출 수 없는 무한한 욕망의 순환구조를 지니고 있기에 이는 무수히 잘라내도 결코 죽지 않는 플라나리아와 매우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작가에 의하면 그것은 또한 현대인들의 숨겨진 파토스’(주로 타성에 젖은 물질적 욕망 자체)에 해당하기도 한다. 자본주의시스템의 마련한 욕망을 찾아, 결코 충족될 수 없고 지속해서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그 욕망의 환영을 쫓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최근작에 등장하는 밧줄이나 뿌리 또한 그런 맥락에 걸쳐져 있는 소재들이다.
 
소비사회는 필요 이상으로 상품을 구매하도록 하는 환각의 체계이다. 노동자가 동시에 소비자라는 너무도 자명한 사실,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물건을 자신의 임금 가치보다 훨씬 더 비싸게 소비한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멈추지 않고 작동하는 핵심 비밀이다. 사물에 대한 욕구에는 특정한 대상이 없다. '대상없는 갈망', 나는 어느 특정의 물건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욕망한다.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을 대신하거나 재현하는 그 무엇이 바로 기호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옷/사물이라는 실제의 물건이 아니라 가상의 혹은 허구의 이미지를 욕망한다. 소비 역시 하나하나의 기호들(소비들)을 배열하고 통합하여 하나의 커다란 의미를 만들어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며 교환의 구조이다. 개인의 소비행위는 그 사회의 코드화 된 교환의 체계 안에 들어간다. 소비는 타인과 구별되고 싶은 욕구의 표출이다. 현대인은 소비인간(homo consomatus)이다. 소비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계급의 문제다. 소비는 단순히 사물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상류층을 상징하는 사물을 소비하는 행위이다. 이때 소비되는 것은 실제 사물이 아니라 상류층이라는 기호 또는 이미지이다. 현대는 실제 물건의 소비가 아니라 상징의 소비, 이미지의 소비, 기호의 소비가 이루어지는 시대다.
 
박은하는 소비사회, 고도의 자본주의사회인 이 체제가 어떻게 개인들의 삶을 무력화하는지, 소외시키는지 등에 관심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그림이 그러한 주제를 의식적으로 연출하거나 목적의식적으로 전달하려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자신이 삶에서 발견한 어떤 조짐, 느낌, 분위기를 가기화하려는 것 같다. 물론 그 징후는 이 자본주의체제가 남긴 상흔과 본질적인 요소들이다. 작가는 인물과 사물 하나하나를 상당히 치밀하고 다소 건조하게 그려내고 있다. 분명 현실에서 흔하게 접하는 풍경, 인물들이지만 그것이 약간 굴절되거나 뒤틀려서 자리하고 있다. 아니 그 사이에 점액질의 액체가 흘러 다니듯, 또는 휘발성 기류나 격렬한 화염처럼 몰려다니는 형상이 그런 느낌을 고양시킨다. 대상의 재현이나 모방이 아니라 인물의 성격, 감정 그리고 풍경과 공간이 지니고 있는 상황적인 분위기, 모종의 징후, 보이지 않는 에너지와 흐름, 불길한 조짐 등을 그리고자 한다. 또한 그러한 상황성을 지켜보는 관자들도 함께 동요하게끔 한다. 그림은 크고 묘사는 지독하고 다소 과잉으로 그려졌다. 사실적인 묘사와 함께 초현실적인 요소들이 뒤섞여 있고 복잡한 구성과 유동적인 이미지가 공존한다. 그런데 박은하의 그림은 모든 면에서 과잉된 느낌을 준다. 여기서 내용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그리느냐 하는 것이 실은 매우 중요하다. 묘사력과 함께 특히 물감의 힘, 표현방식에 대한 고민이 요구되는데 다시 말해 화가의 본성을 드러내는 물감의 사용 같은 것이 그럴 것이다. 물감을 표현적으로 사용하여 인물의 걱정과 근심, 욕망 등의 감정을 드러내는 방법이 요구된다는 것,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그림 속의 인물, 주제보다도 그림 곧 그 자체에 대한 모색이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목표는 자신이 목격한 것의 실재감을 강화시키는 데 있다. 이 목표를 달성 할 수 있는지 여부는 화가가 자신이 선택한 대상과 사물을 얼마나 강렬하게 이해하고 느끼는지에 달려있다. 진지한 관찰로 대상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듯한 감각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아마도 박은하 회화의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2014, 이선영

고양창작스튜디오 작가와의 대화 2014-04 中


 작가가 ‘플라나리아 패턴’이라 이름 붙인, 종이에 마블링해서 생겨난 형상을 활용했던 박은하의 작품들은 굳어져 있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유출 또는 분출된 어떤 힘을 가시화함으로서 주목받았다. 은평 뉴타운 지역의 어지러운 재개발지 풍경이나 사람 얼굴이 오래된 밧줄 뭉치로 변해있는 괴기스러운 초상, 쩍 갈라진 대지가 깊이 상처 난 살 같은 느낌을 주는 요즘의 그림은 ‘박은하 표’로 이미 잘 알려진 그 패턴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원초적인 느낌을 준다. 열심히 그림만 그리던 작가가 유럽의 유명한 미술관 컬렉션을 섭렵하고 다녔던 짧지만 강렬했던 체험이 스스로 ‘동어 반복적’으로 느껴졌던 이전 회화와 단절하게 한 듯하지만, 인물이나 풍경 같은 평범한 광경에서 요동치는 사건을 길어내는 방식은 여전하다. [망가진 바다], [망가진 꽃밭] 등으로 붙여진 작품 제목은 변형에 내재된 파괴적 충동을 드러낸다. 그것들은 실제로 망가지기도 했겠지만, 작가의 시선에 의해 더욱 극적인 장면으로 변모한다.

 그것은 분단이나 재개발 같은 그자체로 민감하고 착잡한 소재를 치장, 또는 과장하는 문제는 아니다. 가령 박은하는 대학과제물 때문에 딱 한번 자화상을 그린 이후, 자화상을 그려 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화상에 넘쳐나는 나르시시즘이나 그 과도한 존재감에 대한 거부감에서였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인 것이다. 진실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주변을 이루는 많은 것들이 허상처럼 다가오고, 그것이 허상인 한 유동적인 변화의 과정 중에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 역시 과정 중에 있다. 주체와 대상은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진동하고 공명한다. 그것이 바로 감각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끊임없이 카오스와 대결하는 사유를 말하며, 여기에서 ‘감각을 진동시키다-감각을 결합시키다-감각을 트이게 하거나 쪼개거나 비어내는’ 과정을 강조한다. 그것이 이전의 감각을 지속하면서도 갱신해 나가는 박은하의 새로운 예술적 개념이다.

 / 이선영 (미술평론가)

2012, 고원석


"100.art.kr: 한국 미술가 100명의 작품 세계 (아르코미술관 편, 열린책들, 2012년 3월)" 中



 박은하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환경의 견고한 틀 속에서 주체성을 잃어버린 채 부유하는 개인들이다. 정밀하게 직조된 시스템의 강력한 권위 앞에서 대부분의 개인들은 무방비 상태로 굴종하며 존재할 뿐이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개인의 일상을 제어하는 이 시스템의 질서는 개인의 다양한 삶의 모습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박은하의 그림이 보여주는 개인과 시스템간의 관계는 극단적이다. 초기에는 시스템의 구조 안에서 영혼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개인들의 모습을 표현했었다. 그들은 짙은 색의 정장을 입고 규격화된 자리에 도열한 채 컴퓨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익명의 남자들이거나, 변함없는 행로를 반복하는 지하철에 무표정하게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최근 그림에서는 시스템의 폭력적 질서로부터 배제되어 변방의 비현실적 영역으로 물러난 사람들의 모습들을 묘사한다. 일반인들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지만 어딘가 분명히 그 존재가 구분되는 노숙자의 모습이나 고깃집의 자극적인 간판 아래 병으로 인해 부푼 배를 드러내놓고 쓰러져 있는 부랑자의 모습이 그러한 예이다. 일견 그들은 그러한 시스템의 틀 안에 정상적으로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경계 밖에 철저히 격리되어 있는 외부인들일 뿐이다.

 박은하의 그림은 일상의 보편적 풍경과 그 속에 존재하는 익명의 인간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지의 한편에 마치 열로 인해 녹아 내린 금속처럼 본질적 질서를 잃고 흘러내린 형태가 야기하는 극적인 반전으로 인해 그 간격은 해체되고 있다. 액상의 형식을 가진 그것은 주변의 다른 환경적 요소들로부터 녹아 내린 것들과 함께 뒤섞이며 캔버스 밖 어딘가로 분출되어버린다. 때로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캔버스로 연결되기도 하고, 때로는 캔버스를 벗어나 월페인팅(wall painting)의 형식으로 확장된다. 비정형의 모습으로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역동적으로 흘러나가는 이 분출은 결국 수많은 관계들이 뒤섞인 채 흘러가는 삶의 본질적인 모습일수도 있다. 그 혼란스러운 용해와 접속, 그리고 분출을 통해 설정되는 새로운 삶의 관계들을 박은하는 매개하고 있는 것이다.

/고원석

2011, 심상용


개인전 안과 밤(inside n' nightside)

사실성-회화(real-ty – painting)와 그 해석적 재현(interpretative representation)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미술평론)



안과 밤(inside n' nightside)


이번 전시의 부제인 ‘안과 밤(inside n' nightside)’에는 박은하의 세상읽기가 잘 함축되어 있다. 박은하는 마주하는 두 개의 세계, 두 개의 차원을 말한다. 그것은 대구(對句)적이되, 그 대칭축은 뒤틀려 있다. 반면 ‘안과 밤’은 얼핏 ‘안과 밖’으로 착음, 착시효과를 야기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안(inside)’은 공간적 구분인 반면, ‘밤(nightside)’은 시간적 실체다. 그러므로 ‘안’과 ‘밤’이 테제와 안티테제로 배열된다거나, ‘밤’이 ‘안’과 대구를 이루는 것이라면 그것은 설명이 필요한 문제다. 단지 밤의 몇몇 보이지 않는 이면(裏面)을 밝히고자 하는 의도의 함축인가? 아니면, ‘밤이 아닌 것’으로서의 ‘안’, 내면(內面)과 그것을 위협하거나 억압하는 질서로서의 밤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밤(night)은 시간적 개념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인가?

박은하의 최근작 《밤의 황제 Emperor of Night》(2011)에는 ‘밤(nightside)’에 대한 추론을 허용하는 하나의 단서가 내포되어 있다. 전경의 원형 테이블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중년의 남성들 가운데 한 명은 가슴에 부착된 배지로 보아 국회의원임에 틀림이 없다. 검정색이나 곤 색의 양복을 입은 그들 모두가 배지를 부착한 사람과 동일하거나 동등한 신분의 소유자들일 수도 있다. 이미 늦은 밤이지만 그들은 뭔가를 논의하고 있다. 그들이 특별히 ‘어둠(nightside)’의 경계 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클로즈업된 맞은편의 풍광에 의해 드러난다. 그들의 맞은편에는 주변을 백주대낮같이 밝히는 조명에 의해 일렬로 정돈되어 있는 ‘목 없는’ 마네킹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각각의 마네킹들은 화려한 원색의 드레스들을 걸쳤음에도 불구하고, 주체성의 극적인 상실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생기 넘치게 뭔가를-설사 그것이 한낱 술수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라도- 만들어내는 근경의 인물들에 비하자면, 일렬로 도열해 있는 그것들은 이미 비참한 절대타자에 불과할 뿐이다.

한 눈으로도 상황을 통제하는 힘은 검정-이나 곤색-의 제복을 걸친 자들의 몫이다. 그들이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움직일 수도 반응할 수도 없이 그저 일렬로 늘어서 있을 뿐인 마네킹들은 세상이 여전히 희생양을 포식하는 아우슈비츠의 가스실과 다를 바 없음에 대한 ‘그려진 포고서’와도 같아 보인다. 게다가 그것들은 자신들의 수치스러운 타자성을 숨길 수조차 없이 시선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이 빛과 밝음의 영역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어둠의 제국에 비해 희생자의 땅은 늘상 노출되어 있다.

야만적인 문명일수록 노출은 불리하게 작용한다. 노출되는 만큼 (적에 의해)공격받을 개연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약육강식의 공간에서 은폐는 우위를 차지한다는 의미가 된다. 야만의 시대, 어둠의 문명일수록, 어둠, 곧 스스로를 감출 수 있는 ‘특권(?)’은 힘있는 자들의 몫이다. 권력은, 그것이 악의 권력에 가까울수록 은폐의 어둠을 선호한다. 그들은 뒤에서 움직인다. 뒤에 숨어서 규정하고, 심판하고, 가격함으로써 희생을 최대화한다. 반면 노출은 죽음만큼이나 혐오하다. 통상 권력자들은 높은 울타리를 친 구조 안에 들어앉아서, 문을 걸어 잠그고는 그 안 깊숙이에 몸을 숨긴다. 굳이 박은하가 그린《야경,night watch》이 아니더라도, 여의도의 국회의사당 건축양식만큼-양식이랄 것도 없지만- 이 사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예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방패를 든 채 일렬로 도열해 의사당 밖을 지키는 ‘전경’들의 모습과 앞서 언급했던 목 없는 마네킹들의 그것 사이에 차이는 없다. 그-전경-들 역시 호출되었을 뿐인 타자의 집합에 불과하다. 정작 힘의 주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일부의 국민에게 집적되어 있다. 그것이 ‘국민주권’이란 허상 이면의 진실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도가들은 자신들의 주택을 몇 겹의 대문으로 차단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비밀에 붙인다. 이따금 예외적인 폭로자들-위기 리크스 같은- 이 알리는 극히 일부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대경실색할만한 곳이다! 반면, 빈자(貧者)들의 가옥은 그 궁핍함에 비례해 외부에 노출됨으로써, 그만큼 덜 위협적이고 세상과 가깝다. ‘다행스럽게도’ 이들은 세상과 자신을 격리할 어떤 경계도 설정할 힘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그들의 무력(無力)에 의해 세상으로부터 숨거나 도주할 수 없다. 노출된 빈자(貧者)의 극단에 박은하가《해바라기,suntrap》(2011)를 통해 그린 노숙인이 있다. 노숙인 이야말로 완전히 노출된 가장 탈권력적이고 탈소유적인 인간이다. 그는 자신을 시선, 곧 힘으로부터 보호할 최소한의 가림막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그가 어떤 권력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반증이다. 박은하는 《해바라기》를 전시장의 가장 높은 곳, 실제로 채광창의 가장 가까운 곳에 배치함으로써, 이 무(산)계급, 무저항계층에 대한 자신의 경의(敬意)를 표한다. 약자들은 노출되고 사냥된다. 이들은 자신을 숨기는 힘도 기술도 가지지 못했으므로, 그로 인한 온갖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삶을 산다. 그렇다면 예술은? 만일 그 예술로 불리는 것이 진실을 드러내는 자신의 속성에 충실한 한, 그것은 약자의 위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강자의 예술’이란 그 자체로 궤변이자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을 밝히기보다는 감추는 데 재능을 발휘하는 예술이 참담한 비극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늘날 은폐되고 있다.



반보(半步) 뒤로 물러섬


박은하는 세상에 대해 다층적인 관점을 취하고, 포괄적으로 접촉하며 은유나 상징 같은 우회어법을 사용한다. 그의 회화는 세상이 부패하고 타락한 곳으로서 파괴 내지는 소멸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1960년대 쯤의 전위주의자들처럼 발톱을 세우고 달려들어 그 한 쪽에 생채기라도 낼 요량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난 한 세기 동안 숱하게 접해온, 세상에 대해 으르렁대면서 선언서를 남발해온 예술들을 생각해 보시라. 그런 ‘선언서 남발형 예술’의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을 지켜보아 온 사람이라면, 그것이 ‘최소한의 의미에서조차’ 진실한 정신의 보증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 터이다.(그 시대는 대체적으로 거의 모두가 그렇게 했다) 게다가 선언 자체의 딜레마가 있다. 그 딜레마에 의해 선언은 자주 진실을 빼돌리고 단순화고 왜곡한다. 선언이 진실을 담보하지 않듯, 선언의 부재가 진실에 무감각하거나 무지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박은하의 어법이 우회적이고 다소 싱거워 보이더라도, 그것은 자극에 중독된 이 시대의 집단적 지각 차원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이겠다.

박은하의 회화가 선언과 무관해 보이는 것은 세상의 경계로부터 그가 반보(半步) 뒤로 물러서 있음과 관련 있다. 이 ‘반 발 뒤’의 위치는 언젠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ide)가 지적했던 ‘망명자의 딜레마’에 의해 방위적으로 보다 명료해 질 수 있다. 물론 예술가도 망명자라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도 지식인의 모습을 포스트모던 시대의 이방인이라 하지 않았던가. 사이드를 따르면, 망명자의 선박을 좌초시킬 수 있는 두 개의 큰 암초가 있는데, 물신숭배적 나르시시즘과 무조건적인 제휴가 그것이다. “전자는 세상으로부터 그를 소외시키고, 후자는 지적인 신중함과 도덕적 용기를 앗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박은하의 회화에서도 경계인이자 중간자로서 망명자의 불편한 태도가 목격된다. 우선 대중을 박수갈채나 보내는 꼭두각시로 취급하고, 부조리한 세상에서 자신만은 예외라는 식의 거만함을 경계한다는 의미에서, 동시에 유행에의 편승, 관리 가능한 범주로의 투항 등을 통한 어떤 ‘무조건적인 제휴’의 흔적, 곧 외부의 압력에 쉽게 굴하지 않는 의미에서.

박은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혁명가나 혁명적 예술가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질이나 태도의 차원이 아니라, 그가 걱정하는 대상이 어떤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는 데서 기인하는 인식적 차원의 문제인 듯하다. 예컨대 그가 바라보는 문제는 민주주의 정부라거나 복지사회, 부의 불평등한 분배, 우생학적 차별 같은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관계 속에 잠복하는 어떤 집약해내기 어려운 흐름, 사회, 경제, 정치적 차원을 넘어 존재적이고 문명적인 차원들로까지 넘어 나가는 두려울 만큼 유동적(liquid)이고 모호하며 산만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박은하가 추격하다 추격당하고,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재추격을 감행하는 진실이다.



사실성-회화(real-ty – painting), 해석적 재현(interpretative representation)


박은하의 회화에 결정적인 고유성을 부여하는 네 가지의 요인이 있는데, 사실성, 연극적 재구성, 상징성, 서술성이다. 박은하의 모든 작품에는 이러한 요인들이 기본적인 성분이 되어 혼합되고 재구성되면서, 이 시대의 인간이 처한 다양한 드라마와 그 안에 내포된 해석의 결들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사실성(寫實性, real-ty)은 다른 특성들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박은하의 세계에서 가장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주제다. 그가 회화 공간 위에 만들어내는 모든 국면, 상황, 드라마는 사실로부터 출발하고, 마지막까지 사실을 위반하지 않는다. 다른 사실들과 결합하고, 재구성되고, 연출되는 경우에도 그것들은 사실의 지평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때로 사실은 상징에 가담하기도 하지만, 이 경우에도 상징성이 사실성을 억압하는 데 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최소한 그것은 사실적인 동시에 상징적이다. 《문화당서점, used bookstore》을 예로 들어보자. 돌연 1950,60년대를 불러들이는 듯한 그 중고책방의 공시적(synchronic) 속성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그것을 서울의 역사적 서사를 짊어진 상징적 모티브로 고착시킬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나《오르낭의 매장》의 계보에 덥석 붙여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문화당 서점’의 사실성은 ‘대상에 대한 재현의 성실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 이외의 세계와 접점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 의해, 즉 그저 하나의 일화적 풍경으로서의 중고책방이기도 하다는 의미에서의 사실성이다.

박은하의 세계가 쿠르베적 사실주의, 그 절대적인 시지각우선주의의 강령과 무관하다는 것은《해바라기,suntrap》같은 작품에서 판명하게 입증된다. 여기서는 사실성과 방법적 추상성, 의미론적 상징성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그 노숙인은 그가 실제로 마주했던 구체적 인물이다.(사실성) 사건으로서의 노숙은 사람들을 거리로 추방하는-반면 어떤 사람들은 수십, 수백 채의 사옥을 ‘재산’으로서 소유하고 있다-이 시대의 잔혹사, 부조리한 실존의 상징적 단면이다. 노숙인은 약자, 박탈당한 자, 유기된 자의 상징이다.(상징성) 작가가 실제로 마주치기도 했었던 실존인물인 노숙인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함으로써, 소유에 미친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치료제가 된다. 작가는 ‘소유의 사회(society of possession)’의 해독제인 그(들)에게 밝고 희망적으로 물결치는 하늘을 선사한다. 그 하늘은 더 이상 시각적으로 재현된 하늘이 아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명백한 추상이다.

박은하가 추구하는 사실성 회화는 경직된 형식주의로서의 사실주의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만큼이나 신표현주의자들의 사실주의(neo-expressionist’s realism)와도 구분된다. 예를 들어《청년,youth》같은 작품을 보자. 이는 각각 별개인 여러 상황들을 이미지 콜라주의 방식을 빌어 연출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전통적 의미의 재현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현시대, 사회적 상황에 대한 보다 적요한 재현이 된다. 이는 그 안에 해석적 기능을 담지함으로써 오히려 재현미학의 임무에 대한 일보 진전된 수행의 방식으로서, ‘해석적 재현(interpretative representation)’, 또는 ‘기능적 재현(functional representation)이라 이를 만하다.

이는 지난 196,70년대 이후 중요하게 부각되었던 신표현주의적 사실주의, 곧 사실을 재현하되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분출을 절제하지 않는 재현인 ‘감정적 재현(emotional representation)에 의존적인 신표현주의적 사실주의와 흥미로운 변별점을 설정해낸다. 독일의 신표현주의 이후의 3,40년 동안 이 감정적 재현에 의한 사실의 추구가 매우 특권을 누려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는 동안 격앙된 감정과 그 직접분출에 선택과 결정을 위임하는 태도와 우연과 임의성, 즉흥성과 예측불가성을 표현의 상위서열에 올려놓으려는 미적 노선이 지지되어 왔음 또한 물론이다. 이러한 흐름이 제도권 미술사에 유입되고 주류로 자리매김 되면서 과도하거나 설익고 어설픈 언어들에까지 주관과 진솔한 감정의 지위를 허용하는 미적, 도덕적 정당성이 남발되었다. 통제력을 상실한 감정의 분출이 마치 더할 나위 없는 저항미학의 성과나 되는 것처럼 포장되었고, 미숙한 언어, 무작위적이고 무질서한 색, 형태와 구성의 남용, 분기탱천의 토로, 해석의 부재가 해방 미학의 소산으로 봉헌되기도 했다. 주관과 감정의 이름이라면 어떤 무작위적인 행위나 제스처라도 진지한 사유의 과정과 그 더딘 실현을 대신해도 된다는 호도가 되풀이 되었고, 심지어는 그러한 표현이야말로 결함과 결핍을 가지고 있는 현실을 표현하기 위한 가장 탁월한 재현의 방식으로 정의되기도 했다.

박은하의 회화는 다른 재현미학의 가능성을 위한 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앞서 ‘해석적 재현’이라 했던 작가의 재현방식은 전통적인 시지각적 재현과 감정적 재현의 요소를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진지하게 반성하고 성찰한다.

무엇보다 박은하의 ‘사실성 회화’가 의미로운 것은 그 사실의 촉을 부단히 인간에 맞추려는 시도 때문이다. 언젠가 오웰(George Orwell)은 매스미디어가 인간을 노예화하고 말거라는 탁월한 예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사실 무언가를 약탈하고 노예화할 수 있는 주체는 인간 밖에 없다. 미디어는 인간으로부터 아무 것도 박탈할 수 없다. 인간만이 인간을 짓밟고, 억압하고, 소외시키고, 두렵게 하고 유기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향해 스스로를 열고 늘 인식할 수 있는 존재 또한 인간일 뿐이다. 그리고 “인간을 향해 스스로를 열 때 그의 영혼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

박은하가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세상은 약탈의 드라마들로 차고 넘친다. 그렇기에 인간을 향해 스스로를 여는 것이 예술의 특권이자 소명이라는 사실이 반드시 환기되어야만 한다.

2010, 이선영

2010.10
탈주하면서 생성하기

박은하 전 | 3.11--8.27, 세오 갤러리
이승현 전 | 7.22--8.29, 갤러리 잔다리


갤러리로 연결된 지하통로 벽면에 그려진 박은하의 벽화와 미술사의 명화들을 변조하여 이색 미술관을 연출한 이승현의 작품들은 구불거리는 불확정적인 선의 흐름을 통해 확실한 형태와 형식을 와해시키려는 충동이 지배적이다. 그들의 작품에서 일상과 역사 속에서 확실한 자리와 위치를 배정받은 형태와 형식들은 모종의 힘에 의해 내부로부터 해체되며 어디론가 흘러간다. 각자 출발한 점은 명료하지만 종착점은 모호하다. 그러나 이들이 확실성을 불확실성으로 변모시키는 이유가 탈주를 위한 것임은 분명하다. 고정된 시공간으로부터 미지의 대지를 향하는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 그 여정의 일차적인 단계는 변형이며, 작품은 변형이 일어나고 전개되는 장이다. 일상으로부터 출발하는 박은하의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을 찍어낸 특수 사진처럼 인간과 사물에서 풍겨 나오는 아우라와 물신적 기운이 얽히고설켜 있다. 이승현은 미학과 미술사의 규범이나 교양에 의해 짜여진 명화라는 대상의 날실과 씨실을 모두 풀어헤쳐 기이한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이들의 작품에서 기존의 형태와 형식으로부터 풀려나온 선들은 분열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방향과 속도로 흘러간다. 정처 없는 여행이나 유목과 비교될 수 있는 이들의 작품은 닫힘에서 열림으로 향하는 과정에 놓여 있다. 그들에게서 고정된 점이나 직선적 요소는 발견되지 않으며, 예측 불가능한 변이가 일어나는 도약지점들이 다수 포진해 있을 뿐이다.

현대적 일상이 사각 캔버스 같은 격자형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면, 사각 캔버스라는 경계를 범람하려는 선들로 가득한 박은하의 그림들은 환경으로 확장되려는 잠재력이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 그녀는 지하로 연결된 좁은 통로를 검게 칠하고 그 위에 푸른색과 보라색을 주조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두 남자를 그렸다. 위, 아니면 아래라는 하나의 방향만을 선택하게 되어 있는 막장 같은 상황에서, 자연광과 인공조명을 통해 드러나는 형태와 선의 흐름은 정장차림의 배불뚝이 남자와 초라한 행색의 마른 남자를 한 쌍의 상징으로 부각시킨다. 작가는 장소의 특수성을 살려서, 건축적 구조를 상징적 차원으로 전이시키며 서로 멀어지는 두 부류의 인간을 전형적 상황으로 배치한다. 밝은 위쪽을 향하는 남자와 어두운 아래쪽을 향하는 남자, 더구나 갤러리의 이전 때문에 굳게 닫혀 있는 아래층을 향하는 남자는 출구 없는 어두운 터널로 추락하는 다수의 삶을 반영하는 것 같아 더욱 우울하다. 각각의 인간에게서 흘러나오는 선들의 얽힘은 양 계급이 분리되는 속도와 방향을 가늠하게 한다. 자본과 노동이 교환되는 시장이 유일한 보편성으로 군림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 연결망들을 통해 권력이 작동된다. 이 연결망의 말단은 천국과 지옥처럼 그 명암이 분명하지만, 연결망 자체는 명확하게 구조화되어 있지는 않다. 이 불확정적인 그물망은 자본주의에 나름의 역동성을 부여한다.

두 도상을 연결시키는 복잡한 선의 흐름은 계급적 차이를 늘릴 수도 줄일 수도 있는 신축성을 가진다. 존재의 가장자리로부터 풀려나온 선들은 꼬이고 꼬인 권력의 그물망을 연상시키면서도 명확한 위계질서를 위협하는 힘으로 보이기도 한다. 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이 폐쇄적 상황의 유일한 희망은 공간을 타고 흐르는 선이다. 그것은 단지 카오스에서 시작되어 카오스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상황을 무한의 가능성으로 도약시키기 때문이다. 직립 보행을 통해 이미 대지로부터 탈영토화 된 인간의 손은 떠도는 선의 한 가닥을 부여잡고 역전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이 벽화에서 선들의 맡은 역할은 변모이다. 선의 흐름에 내포된 변모의 가능성은 양극화로 치닫는 계급적 질서를 혼란시킨다. 혼란은 누군가에게는 희망일 수 있다. 선의 소용돌이 속에 내포된 또 다른 소용돌이, 주름 속에 내포된 또 다른 주름은 유동성을 극대화하며 경직된 구조를 위협하는 생성의 힘이다. 고정된 구조로부터 탈주하고 새로운 대지를 생성하려는 예술의 경향은 자본의 힘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사회적 움직임과 만날 수 있다. 해방은 한 방향으로의 집중이 아니라 집중의 와해이며, 정해진 목표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표류와 탈주는 구별되지 않는다. 선의 흐름은 욕망의 흐름이기도 하다. 박은하의 캔버스 작품에서 욕망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기계, 기계와 기계 사이를 흘러 다녔다면, 이번 벽화는 총체적인 환경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중략-

■이선영

출전 | 아트 인 컬처 2010년 8월호

2010, 김미진

달리는 욕망의 주체들: 매일 매일 실패하는 GET AWAY!

● 박은하의 회화는 현대인들의 일상생활에 침투된 여러 가지 상황을 그려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PC방에 앉아 컴퓨터에 열중하며 빨려 들어가는 모습, 지하철이란 기계에 접속되어 앉아 있는 사람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녀가 그린 일상의 공간은 사실적 표현 위에 기계와 욕망의 기호들과의 상호관계 속에 흐르는 현상의 추상적 표현이 함께 들어가 있다. 그녀는 파스텔조의 색과 선을 사용하며 사물이나 사람이 있는 현실의 공간을 그리고 그들로 부터 빠져나오거나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기운을 유동적 형태로 등고선처럼 그려낸다. 그것은 화면을 떠돌아다니거나 서로 접속되어 있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박은하는 근원적으로 인간존재론적 의미에서의 환경에 지배를 받는 관념적인 것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도처에 편리한 환경을 위해 인간 스스로가 만든 기계와의 유기적관계안에서 심리적 상황도 보여준다.

이번의 박은하의 세오갤러리 월 페인팅은 외부바깥에서부터 내부갤러리로 연결되는 공간을 모두 검게 칠하고 청색 파스텔톤을 주색조로 하는 선을 사용하여 앞을 향해 달려가는 두 남자를 그려내고 있다. 한 사람은 회사사장인 듯 양복 속의 풍만한 몸매를 드러내며 앞만 보고 달려가고 그와 반대방향에서 흰색의 짦은 셔츠와 바지를 입고 마른 몸매의 남자가 달려간다. 실제 계단과 비스듬한 벽을 이용해 달리는 양복맨의 표현은 더욱 실감이 난다. 그는 현재의 순간에서 더 나은 것을 향해 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는 여전히 예측할 수 없다. 그가 뛰면 뛸수록 벽면 코너를 이용해 표현한 반대방향으로 달리는 사람과는 더 많은 간격을 만들어낸다. 박은하는 사장과 직원, 사업가와 지식인처럼 보이는 두 인물에서 이시대의 서로 다른 직업의 계층을 상징한다. 서로가 추구하는 다른 가치관은 배경에서 보여주는 것 같은 불확실한 등고선들을 많이 생산해 낸다. 이들이 추구하며 잡고자 하는 실체는 해체되며 어디로 가는 것이 옳은지 혼돈에 빠져들게 한다.

그들은 더 나은 것이라는 욕망, 욕구, 현실탈피의 개념에 따라 달리고 있지만 그 결과는 결국 계속되는 현실속의 하나의 흐름일 뿐이다. 전 공간을 검은색을 배경으로 칠한 것과 푸른색, 보라색의 주조색들이 그 흐름의 징조들을 상징하고 있다. 수많은 사물들과 정신적 산유물을 쏟아내고 있는 현재에서 우리들이 어떠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도 곧 공허함의 주체가 됨을 보여준다. 박은하는 기계와 욕망에 접속되면서 마력적 기운의 소용돌이를 생산하는 이 시대의 인물과 풍경을 독창적으로 그려내는 기대되는 젊은 작가라 여긴다. ■ 김미진

2008, 김준기

시스템을 연성화하는 유기체의 사유와 감성 : 박은하에 대한 독해와 질문
김준기 (미술평론가, http://www.gimjungi.net/)


박은하는 시스템이 직조해내는 공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박은하의 회화작품에 등장하는 플라나리아는 그 공간을 유영하면서 시스템과 그 바깥의 이분법적인 이항대립 구조를 생성한다. 박은하는 사유와 직관을 동반 관계에 놓고 있다. 구조와 개인, 시스템과 판타지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방식에 있어서 그는 이성적 사유와 감성적 표현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앞세우지 않고 병행하도록 하고 있다. 사무실 공간은 박은하가 생각하는 시스템의 공간을 가장 잘 대변하는 공간이다. 딱딱하게 구조화한 시스템을 파고드는 플라나리아의 부드러움은 이 작가가 시스템을 공격하는 인식론과 감성학을 대변하는 하나의 아이콘이다. 박은하의 회화는 구조화한 공간과 그 공간을 연성화하는 패턴의 유영이 대결하면서 동시에 공존하는 세계이다.

그는 구조와 개인의 관계를 재해석하는 탈현대의 사회학을 담고 있다.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구조의 견고함과 그 속으로 파고드는 박은하 패턴의 유연함은 그가 시스템에 대한 관심을 풀어나가는 실마리이다. 그는 자신의 패턴을 플라나리아로 설정한다. 플라나리아는 시스템에 저항하는 예술가 주체의 자아를 대변하는 유기체이다. 유성생식과 무성생식을 공유하는 자웅동체로서 자생력이 매우 강한 플라나리아는 박은하 예술가 주체의 감성과 사유를 대변하는 분신이다. 그는 구조와 개인, 시스템과 인간의 이항대립을 공간과 플라나리아로 치환한다. 그는 플라나리아를 통해서 무기물의 세계를 연성화하는 유기체로서의 예술가를 꿈꾸고 있다. 박은하의 플라나리아는 구조를 파고드는 개인이며, 안정을 파괴하는 불안이자, 사회를 견제하는 예술이다.

국내외 지인들의 작업실인 카페공간을 통해서 그는 동시대의 공간 풍경들이 국경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질서나 정서를 만들어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플라나리아는 어느 곳 하나 예외 없이 존재하는 빡빡한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판타지이다. 공간을 휘돌며 곡선과 색채를 드리우며 일정한 규칙이 아니라 유동적인 불규칙을 양산하고 다니는 플라나리아는 작가의 판타지를 실현하는 대리주체로 작동한다. 그것은 일상의 메커니즘으로부터 탈출하고자하는 일탈의 꿈을 담고 있다.

스타일의 묘미를 캐내는 일도 중요하다. 기표와 기의의 연동을 이끌어내는 일과 더불어 실재와 의미작용의 구체성을 찾아내기 위해서 그는 장면과 상황을 설정하고 그것을 표현해내는 방법론, 즉 스타일의 문제에 매우 신중하면서도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박은하의 플라나리아는 서사적이기 이전에 심미적이다. 플라나리아는 박은하 스타일을 견인하는 하나의 패턴이다. 그의 플라나리아는 마블링 패턴에서 나왔다. 그것은 화려한 색채를 가진 대리석 무늬(marble pattern)이다. 플라나리아는 매우 감각적인 선과 색의 운율로 이루어진 시각적 장치물 그 자체로도 매우 커다란 비중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문양이 그림을 그리는 화가인 박은하에게 매우 흥미로운 과정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대학시절의 드로잉들이 판타지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점도 그러하거니와 그것이 머리카락이나 물결 무늬, 또는 마블링과 드로잉의 결합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작업 메모에서  알 수 있듯이 애초에 그는 사무실 공간과 자신의 플라나리아가 일탈의 관점에서 공존하면서 시각적인 조화를 이루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플라나리아는 실내 공간의 식물 이미지를 잠식하기도 한다. 인물이 부재한 공간에서 인물의 등장하는 공간으로 변화해 나간 그의 공간 작업은 공간의 구석구석은 물론 인물과 상호 작용을 통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는 데로 진화했다.

이러한 작업은 사물 자체에 마블링 패턴을 입히는 그림으로 나아갔다. 테이블이며 의자, 스텐드 안경 등 화려한 마블링 패턴의 옷을 입은 사물은 그 자체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으며 공간과 사물의 돌연변이가 만들어내는 화면의 스펙터클은 그 자체로 회화적 상상력을 발현한다. 그는 캔버스 안의 플라나리아를 전시장 바깥 공간으로 확장하기도 했다. 작업실에서 완성한 캔버스 그림과 전시장에서의 월-페인팅을 결합한 작업으로 그는 자신의 플라나리아를 더욱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동시에 자신이 의도하는 일상 공간으로부터의 일탈이라는 이슈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최근에 나타나는 플라나리아의 보다 다이내믹한 형태와 색채들은 공간을 감싸고 도는 마블링 패턴의 심미성이 절정에 도달했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 박은하는 자신의 패턴을 인물 작업에 대입하고 있다. 는 PC방에 앉아서 컴퓨터와 1:1 커뮤니케이션 중인 일곱 사람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PC방 칸막이의 반복되는 구조와 그 앞에 앉은 인물들이 비정형의 마블링 패턴으로 녹아서 컴퓨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이미지의 변형은 현대사회의 단면을 그려내는 데 있어서 박은하의 플라나리아가 매우 유효한 스타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해준다. 스타일의 독창성을 탁월한 의미작용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작품이다. 이 작품에 이르러 박은하는 득의(得義)를 획득했다. 가장 최근작인 인물 그림 은 플라나리아의 향배를 가늠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상의 간략한 독해를 전제로 다음의 몇 가지 토론 거리를 던진다.

1.
박은하의 스타일과 그의 내러티브는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의미작용을 남기고 있는가? 만약 박은하가 설정한 장면이나 상황이 플라나리아라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요즘 작가들이 지루하게 반복하고 있는 일상담론에 포박된 채 그 이상의 의미를 생산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면 플라나리아라는 박은하의 스타일은 무의미한 일상담론의 한계를 벗어나 일탈의 담론으로 나아가는 데에 있어 결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과연 박은하의 플라나리아는 마블링 패턴이라는 조형적 장치 이상의 의미생산을 결과하고 있는지 따져볼 문제다.
2.
총체성을 상실한 시대, 미시적 서사의 창궐. 1990년대 중후반 이후의 한국현대미술을 가장 포괄적으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들이다. 거대 서사의 난망함을 익히 경험한 바, 우리는 미시 서사를 통해서 현실을 읽어내는 새로운 길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난무하는 일상담론은 밋밋하고 수평적인 나열과 상투적인 재현을 반복하고 있다. 박은하의 작업은 이러한 현실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우리 시대의 예술은 이 지루한 여정의 한가운데서 어떤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대볼 일이다.
3.
박은하의 공간과 구조와 인물과 대상에는 특정성이 결여해있다. 박은하는 익명화한 지인의 공간이나 익명의 현대인들의 공간을 회화적 재현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박은하가 그려내는 공간과 패턴이 환기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명쾌한 전략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특정 인물의 특정 공간이 우리에게 일상과 일탈의 경계에서 어떤 내러티브를 전달하고 있는지가 보다 명확하게 다가설 수는 없는지, 혹은 그 특정성을 완전히 소멸시킴으로써 또 다른 효과를 가져올 수는 없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나아가 장소 특정성을 넘어 의제 특정성을 획득하는 길은 없겠는지 작가와 여느 패널들의 생각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