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고원석


"100.art.kr: 한국 미술가 100명의 작품 세계 (아르코미술관 편, 열린책들, 2012년 3월)" 中



 박은하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환경의 견고한 틀 속에서 주체성을 잃어버린 채 부유하는 개인들이다. 정밀하게 직조된 시스템의 강력한 권위 앞에서 대부분의 개인들은 무방비 상태로 굴종하며 존재할 뿐이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개인의 일상을 제어하는 이 시스템의 질서는 개인의 다양한 삶의 모습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박은하의 그림이 보여주는 개인과 시스템간의 관계는 극단적이다. 초기에는 시스템의 구조 안에서 영혼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개인들의 모습을 표현했었다. 그들은 짙은 색의 정장을 입고 규격화된 자리에 도열한 채 컴퓨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익명의 남자들이거나, 변함없는 행로를 반복하는 지하철에 무표정하게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최근 그림에서는 시스템의 폭력적 질서로부터 배제되어 변방의 비현실적 영역으로 물러난 사람들의 모습들을 묘사한다. 일반인들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지만 어딘가 분명히 그 존재가 구분되는 노숙자의 모습이나 고깃집의 자극적인 간판 아래 병으로 인해 부푼 배를 드러내놓고 쓰러져 있는 부랑자의 모습이 그러한 예이다. 일견 그들은 그러한 시스템의 틀 안에 정상적으로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경계 밖에 철저히 격리되어 있는 외부인들일 뿐이다.

 박은하의 그림은 일상의 보편적 풍경과 그 속에 존재하는 익명의 인간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지의 한편에 마치 열로 인해 녹아 내린 금속처럼 본질적 질서를 잃고 흘러내린 형태가 야기하는 극적인 반전으로 인해 그 간격은 해체되고 있다. 액상의 형식을 가진 그것은 주변의 다른 환경적 요소들로부터 녹아 내린 것들과 함께 뒤섞이며 캔버스 밖 어딘가로 분출되어버린다. 때로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캔버스로 연결되기도 하고, 때로는 캔버스를 벗어나 월페인팅(wall painting)의 형식으로 확장된다. 비정형의 모습으로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역동적으로 흘러나가는 이 분출은 결국 수많은 관계들이 뒤섞인 채 흘러가는 삶의 본질적인 모습일수도 있다. 그 혼란스러운 용해와 접속, 그리고 분출을 통해 설정되는 새로운 삶의 관계들을 박은하는 매개하고 있는 것이다.

/고원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