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김준기

시스템을 연성화하는 유기체의 사유와 감성 : 박은하에 대한 독해와 질문
김준기 (미술평론가, http://www.gimjungi.net/)


박은하는 시스템이 직조해내는 공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박은하의 회화작품에 등장하는 플라나리아는 그 공간을 유영하면서 시스템과 그 바깥의 이분법적인 이항대립 구조를 생성한다. 박은하는 사유와 직관을 동반 관계에 놓고 있다. 구조와 개인, 시스템과 판타지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방식에 있어서 그는 이성적 사유와 감성적 표현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앞세우지 않고 병행하도록 하고 있다. 사무실 공간은 박은하가 생각하는 시스템의 공간을 가장 잘 대변하는 공간이다. 딱딱하게 구조화한 시스템을 파고드는 플라나리아의 부드러움은 이 작가가 시스템을 공격하는 인식론과 감성학을 대변하는 하나의 아이콘이다. 박은하의 회화는 구조화한 공간과 그 공간을 연성화하는 패턴의 유영이 대결하면서 동시에 공존하는 세계이다.

그는 구조와 개인의 관계를 재해석하는 탈현대의 사회학을 담고 있다.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구조의 견고함과 그 속으로 파고드는 박은하 패턴의 유연함은 그가 시스템에 대한 관심을 풀어나가는 실마리이다. 그는 자신의 패턴을 플라나리아로 설정한다. 플라나리아는 시스템에 저항하는 예술가 주체의 자아를 대변하는 유기체이다. 유성생식과 무성생식을 공유하는 자웅동체로서 자생력이 매우 강한 플라나리아는 박은하 예술가 주체의 감성과 사유를 대변하는 분신이다. 그는 구조와 개인, 시스템과 인간의 이항대립을 공간과 플라나리아로 치환한다. 그는 플라나리아를 통해서 무기물의 세계를 연성화하는 유기체로서의 예술가를 꿈꾸고 있다. 박은하의 플라나리아는 구조를 파고드는 개인이며, 안정을 파괴하는 불안이자, 사회를 견제하는 예술이다.

국내외 지인들의 작업실인 카페공간을 통해서 그는 동시대의 공간 풍경들이 국경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질서나 정서를 만들어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플라나리아는 어느 곳 하나 예외 없이 존재하는 빡빡한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판타지이다. 공간을 휘돌며 곡선과 색채를 드리우며 일정한 규칙이 아니라 유동적인 불규칙을 양산하고 다니는 플라나리아는 작가의 판타지를 실현하는 대리주체로 작동한다. 그것은 일상의 메커니즘으로부터 탈출하고자하는 일탈의 꿈을 담고 있다.

스타일의 묘미를 캐내는 일도 중요하다. 기표와 기의의 연동을 이끌어내는 일과 더불어 실재와 의미작용의 구체성을 찾아내기 위해서 그는 장면과 상황을 설정하고 그것을 표현해내는 방법론, 즉 스타일의 문제에 매우 신중하면서도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박은하의 플라나리아는 서사적이기 이전에 심미적이다. 플라나리아는 박은하 스타일을 견인하는 하나의 패턴이다. 그의 플라나리아는 마블링 패턴에서 나왔다. 그것은 화려한 색채를 가진 대리석 무늬(marble pattern)이다. 플라나리아는 매우 감각적인 선과 색의 운율로 이루어진 시각적 장치물 그 자체로도 매우 커다란 비중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문양이 그림을 그리는 화가인 박은하에게 매우 흥미로운 과정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대학시절의 드로잉들이 판타지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점도 그러하거니와 그것이 머리카락이나 물결 무늬, 또는 마블링과 드로잉의 결합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작업 메모에서  알 수 있듯이 애초에 그는 사무실 공간과 자신의 플라나리아가 일탈의 관점에서 공존하면서 시각적인 조화를 이루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플라나리아는 실내 공간의 식물 이미지를 잠식하기도 한다. 인물이 부재한 공간에서 인물의 등장하는 공간으로 변화해 나간 그의 공간 작업은 공간의 구석구석은 물론 인물과 상호 작용을 통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는 데로 진화했다.

이러한 작업은 사물 자체에 마블링 패턴을 입히는 그림으로 나아갔다. 테이블이며 의자, 스텐드 안경 등 화려한 마블링 패턴의 옷을 입은 사물은 그 자체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으며 공간과 사물의 돌연변이가 만들어내는 화면의 스펙터클은 그 자체로 회화적 상상력을 발현한다. 그는 캔버스 안의 플라나리아를 전시장 바깥 공간으로 확장하기도 했다. 작업실에서 완성한 캔버스 그림과 전시장에서의 월-페인팅을 결합한 작업으로 그는 자신의 플라나리아를 더욱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동시에 자신이 의도하는 일상 공간으로부터의 일탈이라는 이슈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최근에 나타나는 플라나리아의 보다 다이내믹한 형태와 색채들은 공간을 감싸고 도는 마블링 패턴의 심미성이 절정에 도달했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 박은하는 자신의 패턴을 인물 작업에 대입하고 있다. 는 PC방에 앉아서 컴퓨터와 1:1 커뮤니케이션 중인 일곱 사람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PC방 칸막이의 반복되는 구조와 그 앞에 앉은 인물들이 비정형의 마블링 패턴으로 녹아서 컴퓨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이미지의 변형은 현대사회의 단면을 그려내는 데 있어서 박은하의 플라나리아가 매우 유효한 스타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해준다. 스타일의 독창성을 탁월한 의미작용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작품이다. 이 작품에 이르러 박은하는 득의(得義)를 획득했다. 가장 최근작인 인물 그림 은 플라나리아의 향배를 가늠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상의 간략한 독해를 전제로 다음의 몇 가지 토론 거리를 던진다.

1.
박은하의 스타일과 그의 내러티브는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의미작용을 남기고 있는가? 만약 박은하가 설정한 장면이나 상황이 플라나리아라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요즘 작가들이 지루하게 반복하고 있는 일상담론에 포박된 채 그 이상의 의미를 생산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면 플라나리아라는 박은하의 스타일은 무의미한 일상담론의 한계를 벗어나 일탈의 담론으로 나아가는 데에 있어 결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과연 박은하의 플라나리아는 마블링 패턴이라는 조형적 장치 이상의 의미생산을 결과하고 있는지 따져볼 문제다.
2.
총체성을 상실한 시대, 미시적 서사의 창궐. 1990년대 중후반 이후의 한국현대미술을 가장 포괄적으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들이다. 거대 서사의 난망함을 익히 경험한 바, 우리는 미시 서사를 통해서 현실을 읽어내는 새로운 길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난무하는 일상담론은 밋밋하고 수평적인 나열과 상투적인 재현을 반복하고 있다. 박은하의 작업은 이러한 현실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우리 시대의 예술은 이 지루한 여정의 한가운데서 어떤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대볼 일이다.
3.
박은하의 공간과 구조와 인물과 대상에는 특정성이 결여해있다. 박은하는 익명화한 지인의 공간이나 익명의 현대인들의 공간을 회화적 재현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박은하가 그려내는 공간과 패턴이 환기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명쾌한 전략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특정 인물의 특정 공간이 우리에게 일상과 일탈의 경계에서 어떤 내러티브를 전달하고 있는지가 보다 명확하게 다가설 수는 없는지, 혹은 그 특정성을 완전히 소멸시킴으로써 또 다른 효과를 가져올 수는 없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나아가 장소 특정성을 넘어 의제 특정성을 획득하는 길은 없겠는지 작가와 여느 패널들의 생각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