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전성원

박은하,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에서 찾는 희망
 
전성원(계간 황해문화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1. 여기에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려라(Lasciate ogni speranza, voi ch'entrate).
 
나를 지나는 사람은 슬픔의 도시로, 나를 지나는 사람은 영원한 비탄으로, 나를 지나는 사람은 망자에 이른다.
정의는 지고하신 주를 움직이시어, 신의 권능과 최고의 지와 원초의 사랑으로 나를 만들었다.
나보다 앞서는 피조물이란 영원한 것뿐이며 나 영원히 서 있으리. 여기에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려라.
-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지옥편, <3>, 1~9
 
화가 박은하로부터 인천 <아트플랫폼> 레지던시와 관련해 자신을 만나 인터뷰한 뒤 그걸 바탕으로 짧은 글을 하나 써달라는 제안을 받았던 것이 올해 6월의 일이다. 그 무렵 나는 단테를 읽고 있었다. 작년 4월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 이후 지옥(地獄)을 헤매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대 그 이전까지 박은하란 작가를 잘 알진 못했다. 20131월 무렵 인터넷 공간을 통해 처음 만났을 때, 독특한 느낌의 마블링(marbling)’ 기법을 사용해 작업하는 젊은 화가란 정도만 알고 있었다.
서양에서는 이 기법으로 된 그림 무늬가 대리석 무늬와 닮았다고 해서 마블링이라고 했지만, 본래 마블링이란 중동지방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터키 지역에서는 물 위에 기름과 염료를 떨어뜨려 무늬를 만들고 송곳으로 그림을 그려 기름종이로 찍어내는 전통미술방식으로 에브루(Ebru)’라고 한다. 물에 젖은 노면이나 물 위에 떠오른 기름을 보면, 주변의 떨림과 흔들림에 따라 문양이 조금씩 변화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순한 형태에서 복잡한 무늬로 변하고 다시 분화(分化)하고 확산(擴散)해 간다.
마블링은 이러한 표현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하는 유동하는 무늬를 어느 한순간 종이에 흡착시켜 고정하는 기법으로 우연(偶然)한 운동(運動)을 눈으로 쫓다보면 새로운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박은하의 마블링 작업들은 그런 우연에 기대는 작업아 아니고 일일이 손으로 그려 넣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우연성에 기대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에 따라 마블링처럼 표현된 것이므로 정확하게는 마블링 기법이 아니라 마블링 스타일이라고 해야 한다. 우연이 아닌 의도에 의한 표현이란 점에서 박은하의 마블링은 작가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유동하는 세계를 떠도는 삶과 일상의 공간감, 확산과 연결(連結)에 대한 욕망은 박은하의 세계를 구성하는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2. 플라나리아 오브제(Planarian-Object) - 통속(通俗)과 반통속(反通俗)
프로젝트의 특성상 한 번은 반드시 만나야 한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끝끝내 만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의 공통점일리는 없을 테고, 나만의 게으름 또는 누군가에 대해 비평하는 작업에 직접적인 만남이 반드시 필요한가라는 의문은 뒤로 해두자. 작가의 아틀리에에서 우연을 가장한 만남 이후 나는 직접 만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 모두 연결에 대한 욕망 못지않게 은폐와 잠적에 대한 강한 열망의 소유자란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일단 박은하가 마무리 작업 중이던 작품들을 직접 볼 수 있어서 좋았고, 넥센 야구팀을 좋아하는 인간적 매력을 가진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인천 아트플랫폼 내부는 흡연금지공간이었지만, 우리는 선생님 몰래 숨어서 담배를 나눠 피우는 불량학생들처럼 작품세계와는 별 관련도 없을 법한 시시껄렁한 대화들을 나눴다. 기본적으로 나는 문자로 된 텍스트내러티브 구조를 갖춘 텍스트를 해독하고 비평하는 훈련을 쌓았을 뿐 이미지(image), 그 중에서도 회화를 독해하거나 미술작업에 대해 비평하는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문외한이다. (그러나 그건 보들레르나, 벤야민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그럼에도 박은하라는 텍스트(삶과 작업)를 읽어내는 작업에 기댈 만한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문학이론입문에서 징후적 독법(symptomatic reading)’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징후적 독법이란 알튀세르가 정신분석학에 기대어 정식화한 개념으로 텍스트가 억압하였지만 완전히 억압하지 못한 것들, 작품이 말하고 있지 않은 것들에 주목한다. 이른바 텍스트의 무의식인 셈이다. 신체적 증상(symptom), 오한이나 발진, 식은 땀 같은 통증을 통해 의사가 병인(病因)을 추측하고 분석하듯, 독자와 비평가는 작가와 작품이 말하고 있지 않은 내용, 그것을 말하지 않는 방식 또한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와 나눈 얼핏 주제와 관련 없어 보이는 대화들을 통해 나는 작가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느낌이었다. 재미있는 지점은 작가 스스로 말하길 자신은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는 화가이며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것과 달리 자신이 사회적 문제에 대해 발화(發話)하는 작가는 아니라고 수줍게 고백하더라는 것이다. (, 이런 젠장. 그림을 소장한 고객이나 미술관이 들으면 안 되는 얘기잖아. 그런 건 영업비밀입니다.) 박은하의 초기 작품들(2007~2009)은 대중의 현대적 일상과 오브제들을 주로 다룬다. 예를 들어 <플라나리아 오브제(Planarian-Object)>들은 전기스탠드, 의자, 테이크아웃 컵, 상담실, 자동차 카페, 오피스 공간들이다. 이 일련의 작업들의 표제이기도 한 플라나리아는 크게 세 가지의 생물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자웅동체로 무성·유성 생식을 하고, 재생력이 강하여 몸을 반토막내더라도 각기 다른 개체로 재생한다. 무엇보다 이 생물의 가장 큰 특징은 배설기관인 항문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생물은 먹고 싼다. 식도부터 항문까지 하나의 소화기관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통속(通俗)’이라 할 수 있다. 황지우의 네 번째 시집 게눈 속의 연꽃뒤표지에는 시인의 인상적인 말이 있다. “그대 몸 속 한가운데에 내부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입에서 항문까지 그 꾸불꾸불한 길은 외부이다. 그러니까 삶은 거듭되는, 커다란 빵꾸이다. …… 여기가 바로 바깥인데 왜 안나가지냐.” 세계의 순환원리이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세계는 체제의 바깥을 상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닫힌 체제가 되었다. 이 시기 박은하가 보여주고 있는 작업 경향은 캔버스에 일상의 공간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시점은 어안렌즈를 통해 바라보듯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풍선처럼 과장되게 부풀려져 있다. 친숙한 일상의 공간이지만 낯선 공간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마치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작품 속 주인공들처럼 고립되어 있다. 그 고립감은 호퍼처럼 외부로 표출될 수 없는, 다시 말해 항문조차 없는 고립감이지만, 외부와 연결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은 마블링을 통해 초현실적으로 묘사된다. 나는 이 마블링을 아우라(aura)'라고 부르고 싶은데, 그것 - 분출되거나 가로막는 것으로 보이는 것 - 연결에 대한 열망의 표현인지, ‘잠금된 상황 자체이거나 세상과의 연결을 가로막는 하나의 장애물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3. 중요한 것은 희망을 배우는 것이다(Es kommt darauf an, das Hoffen zu lernen).
마블링 스타일을 제외하고도 박은하의 작업에서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전시 공간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일련의 시리즈들에 이르면 마블링 기법을 통해 표현된 아우라는 담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처럼 잠금된 세계를 뚫고 나가려는 강한 열망의 징후임을 확인할 수 있다. 박은하의 작품들은 캔버스 내부에 갇혀있길 원치 않는다는 듯 사각의 캔버스 외부로의 탈주(Get Away)’를 통해 서로 끊임없이 매개(媒介)하고 연결되길 희망한다.
박은하가 입주해 있는 인천 아트 플랫폼을 방문했을 때, 화가의 작업실에 상당히 다양한 책들이 꽂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경험과 삶의 고단함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작가는 아직 읽지 못했다면서도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희망의 원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블로흐는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추구하려는 바를 인간의 자연화를 풍요롭게 발전시키는 일이라고 표현하였다. 역사의 뿌리는 바로 인간이다. 그는 노동하고, 창조하며, 주어진 환경을 변화시키고 이를 추월하지 않는가? 만약 인간이 자신을 파악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속에서 소외 혹은 외화(外化) 없는 자기 자신을 증명한다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의 유년기에 갈구했으며, 누구도 아직 실현하지 못한 무엇이 출현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고향이라고 말했다.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경우는 조금씩 다르지만 우리는 제법 흡사한 유년기를 보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고통을 안고 살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른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유년의 고통에만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유년의 고통에만 천착하여 스스로 헤치고 나올 줄 모르는 사람은 성장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고통을 오로지 자신만의 경험으로 내재화하여 타인의 고통은 자신에 비해 하잘 것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어 타인(사회)의 고통에 둔감해진다.
지옥이란 어떤 곳인가? 마음속에 타인이 없으며, 남을 품을 수 없는 세상이 바로 지옥이다. 그런 곳에서는 아무런 희망도 품을 수 없다. 그와 같은 지옥은 작가가 담아내고 있는 세상의 모습 속 깊게 패인 골짜기에도 있고, 깨진 항아리에도 있고, 혼탁한 물결만이 흘러가는 쓰레기처럼 부유하는 강물의 물결 속에도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모두스 비벤디 -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에서 이렇게 말한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끊임없는 경각심이 필요하고 불안이 따르는 위험한 길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박은하의 작품들은 평온한가? 우리는 작품에서 어떤 병증(病症)을 예감하며, 통증을 감지한다. 그러나 작품 속에 묘사되고 있는 인물의 표정은 너무나 평온하다. 마치 이성복의 시 <그날>의 한 구절처럼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던 것처럼. 박은하의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개인전에 나온 작품들은 그런 세상에 대한 담담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다. 세상은 병들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것을 말하고 있다. 자신의 신체와 영혼에 깃든 시대의 통증을 감지한다.
박은하가 담아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은 어쩌면 지옥도(地獄圖)일지 모른다. 작가는 가로막히고 잠긴 공간과 공간을 서로 잇고, 고통스러운 열망과 환멸을 반복하는 작업들을 통해 정작 자신의 희망은 상처받지만, 다시 그 환멸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몸부림을 계속한다. “낮꿈을 꾸는 자가 일어서서 그 꿈의 실천을 통해 구체적으로 창조해 낼 때 그 행위 속에서 희망은 존재한다던 블로흐의 말처럼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희망은 어디에도 없지만 “tamen(그럼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