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박영택

박은하-주변부 삶에 대한 필경사로서의 그리기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박은하의 그림은 대담한 구상미술이다. 커다란 스케일감각이 압도하고 화면 안에 자리하고 있는 복잡한 내용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크고 집요하고 비장하다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이런 느낌은 작가가 그림에 부여하는 모종의 의도에 따른 것일지도 모른다. 본인이 크게 감동받았거나 절실히 느낀 것, 그래서 전달하고 싶은 것을 그만큼 정성껏, 절실하게 그렸다는 의지가 묻어난다. 박은하의 모든 그림은 특정 장소, 장면, 상황을 전달하고자 하는 배려에 우선한다. 그것은 메시지가 있는 그림이자 뜨거운 문장 같은 그림이다. 그러니까 작가는 자신의 삶의 반경 속에서 문득 발견한 것, 마주친 현실에서 피할 수 없이 접촉한 것을 소재로 한다. 그것은 이 사회가 어떤 것인지를 본인이 직관적으로 발견한 장면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대부분 어둡고 비관적이며 불길한 것이다. 이 서사적인 구상화는 지독한 그리기와 시각적인 충격, 그리고 화면 내부의 맥락을 순식간에 허물어버리는 액체성 물질의 연출로 자리하고 있다.
 
작가는 한국이라는 자본주의사회의 본질, 또는 치열한 생존경쟁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 그들의 불안과 권태와 공포를 그림으로 그리고자 한다. 물론 이는 단지 한국에만 해당하지는 않는다. 여행길에 접한 이국의 삶의 현장에서도 유사한 장면을 목도한다.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생을 연명해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에게는 거의 유일한 관심사다.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림 안에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지닌 가난, 불안, 공포, 소외 등의 감정이 착잡하게 번져나간다. 작가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겪는 생의 고통스러움, 혹은 체제에서 거세되어진 변방의 현대인들, 체제에서 배제된 아웃사이더들의 모습을 주밀하게 관찰하고 이를 세밀하게 기록했다. 사무실, 카페, 도심 속의 다양한 현대 사회 공간 속에서 두려움을 지니며 생존을 모색하는 이들이다. 작가는 필경사처럼 그림을 그렸다. 그들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그 역시 이 가혹한 자본주의 체제 밖에서 살아가는 잉여적 존재로서의 심리적 소외를 지녔기에 그러한 장면을 주목한 것 같다. 작가는 단지 관찰과 주목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삶과 상황을, 감정을 묘사하고자 하며 이는 결국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니 박은하의 작품은 결국 자신의 내면의 풍경화인 셈이다. 자신과 동일한 운명들에 대한 애정과 애도의 감정이 짙게 묻어있다고도 하겠다. 그러니까 그림의 내용은 평소 본인의 느끼고 인식하고 있는 이 사회시스템이 지니고 있는 모순과 그에 대한 불편함, 자신의 삶의 경험을 힘껏 이미지화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힘껏의 힘과 가득 채워놓고자 하는 강박이 그림의 기본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커다란 그림은 보는 이의 육체를 화면 안으로 수렴시킨다. 관자의 눈앞에 가득 펼쳐준다. 그래서 특정 상황과 홀로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 이 장소에서 이런 상황을 직접적으로 목도하고 있다는 그런 관찰자의 기분이 절로 베어들게 한다. 눈을 떼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작가는 분명 회화의 힘과 충격에 대해 고려하고 있었던 듯하다. 작가에게 그림이란 충격, 감동, 공감을 주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림은 다분히 설명적이고 일러스트레이션과 유사한 편이다. 장면을 설정하고 인물을 배치한 후 전체적인 분위기를 강조한 후에 그 위로, 주변으로 기이한 형체를 지닌 부유물(일종의 마블링)을 그려 넣는다. 그것들은 떠다니고 갑자기 분출되면서 정적인 화면을 혼돈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인물의 내면, 정신 혹은 비가시적인 그 무엇이 밖으로 유출된 듯이 보이게 만든다. 아마도 이 액체성, 유동성 물질의 개입과 침투가 이 작가 그림의 흥미로운 특징이고 변별성을 지닌 것으로 많은 이들에게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 유동적인 흐름을 보여주는 형상을 플라나리아(플라나리아는 재생력이 강하기로 유명한 생명체를 지칭한다. 진화가 덜 된 이 편형돌물은 아무리 잘라도 회복하는 능력으로 인해 거의 불멸에 가까운 존재라고 한다.)와 유사한 것으로 그려내고 있다. 플라나리아의 무서운 생명력과 재생력은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 자본주의시스템의 본질과 매우 유사한 지점에 있기에 은유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욕망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고 그 시스템 아래 길들이고 조종하는 한편 결코 그 어떤 것으로도 멈출 수 없는 무한한 욕망의 순환구조를 지니고 있기에 이는 무수히 잘라내도 결코 죽지 않는 플라나리아와 매우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작가에 의하면 그것은 또한 현대인들의 숨겨진 파토스’(주로 타성에 젖은 물질적 욕망 자체)에 해당하기도 한다. 자본주의시스템의 마련한 욕망을 찾아, 결코 충족될 수 없고 지속해서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그 욕망의 환영을 쫓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최근작에 등장하는 밧줄이나 뿌리 또한 그런 맥락에 걸쳐져 있는 소재들이다.
 
소비사회는 필요 이상으로 상품을 구매하도록 하는 환각의 체계이다. 노동자가 동시에 소비자라는 너무도 자명한 사실,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물건을 자신의 임금 가치보다 훨씬 더 비싸게 소비한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멈추지 않고 작동하는 핵심 비밀이다. 사물에 대한 욕구에는 특정한 대상이 없다. '대상없는 갈망', 나는 어느 특정의 물건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욕망한다.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을 대신하거나 재현하는 그 무엇이 바로 기호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옷/사물이라는 실제의 물건이 아니라 가상의 혹은 허구의 이미지를 욕망한다. 소비 역시 하나하나의 기호들(소비들)을 배열하고 통합하여 하나의 커다란 의미를 만들어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며 교환의 구조이다. 개인의 소비행위는 그 사회의 코드화 된 교환의 체계 안에 들어간다. 소비는 타인과 구별되고 싶은 욕구의 표출이다. 현대인은 소비인간(homo consomatus)이다. 소비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계급의 문제다. 소비는 단순히 사물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상류층을 상징하는 사물을 소비하는 행위이다. 이때 소비되는 것은 실제 사물이 아니라 상류층이라는 기호 또는 이미지이다. 현대는 실제 물건의 소비가 아니라 상징의 소비, 이미지의 소비, 기호의 소비가 이루어지는 시대다.
 
박은하는 소비사회, 고도의 자본주의사회인 이 체제가 어떻게 개인들의 삶을 무력화하는지, 소외시키는지 등에 관심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그림이 그러한 주제를 의식적으로 연출하거나 목적의식적으로 전달하려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자신이 삶에서 발견한 어떤 조짐, 느낌, 분위기를 가기화하려는 것 같다. 물론 그 징후는 이 자본주의체제가 남긴 상흔과 본질적인 요소들이다. 작가는 인물과 사물 하나하나를 상당히 치밀하고 다소 건조하게 그려내고 있다. 분명 현실에서 흔하게 접하는 풍경, 인물들이지만 그것이 약간 굴절되거나 뒤틀려서 자리하고 있다. 아니 그 사이에 점액질의 액체가 흘러 다니듯, 또는 휘발성 기류나 격렬한 화염처럼 몰려다니는 형상이 그런 느낌을 고양시킨다. 대상의 재현이나 모방이 아니라 인물의 성격, 감정 그리고 풍경과 공간이 지니고 있는 상황적인 분위기, 모종의 징후, 보이지 않는 에너지와 흐름, 불길한 조짐 등을 그리고자 한다. 또한 그러한 상황성을 지켜보는 관자들도 함께 동요하게끔 한다. 그림은 크고 묘사는 지독하고 다소 과잉으로 그려졌다. 사실적인 묘사와 함께 초현실적인 요소들이 뒤섞여 있고 복잡한 구성과 유동적인 이미지가 공존한다. 그런데 박은하의 그림은 모든 면에서 과잉된 느낌을 준다. 여기서 내용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그리느냐 하는 것이 실은 매우 중요하다. 묘사력과 함께 특히 물감의 힘, 표현방식에 대한 고민이 요구되는데 다시 말해 화가의 본성을 드러내는 물감의 사용 같은 것이 그럴 것이다. 물감을 표현적으로 사용하여 인물의 걱정과 근심, 욕망 등의 감정을 드러내는 방법이 요구된다는 것,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그림 속의 인물, 주제보다도 그림 곧 그 자체에 대한 모색이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목표는 자신이 목격한 것의 실재감을 강화시키는 데 있다. 이 목표를 달성 할 수 있는지 여부는 화가가 자신이 선택한 대상과 사물을 얼마나 강렬하게 이해하고 느끼는지에 달려있다. 진지한 관찰로 대상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듯한 감각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아마도 박은하 회화의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