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심상용


개인전 안과 밤(inside n' nightside)

사실성-회화(real-ty – painting)와 그 해석적 재현(interpretative representation)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미술평론)



안과 밤(inside n' nightside)


이번 전시의 부제인 ‘안과 밤(inside n' nightside)’에는 박은하의 세상읽기가 잘 함축되어 있다. 박은하는 마주하는 두 개의 세계, 두 개의 차원을 말한다. 그것은 대구(對句)적이되, 그 대칭축은 뒤틀려 있다. 반면 ‘안과 밤’은 얼핏 ‘안과 밖’으로 착음, 착시효과를 야기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안(inside)’은 공간적 구분인 반면, ‘밤(nightside)’은 시간적 실체다. 그러므로 ‘안’과 ‘밤’이 테제와 안티테제로 배열된다거나, ‘밤’이 ‘안’과 대구를 이루는 것이라면 그것은 설명이 필요한 문제다. 단지 밤의 몇몇 보이지 않는 이면(裏面)을 밝히고자 하는 의도의 함축인가? 아니면, ‘밤이 아닌 것’으로서의 ‘안’, 내면(內面)과 그것을 위협하거나 억압하는 질서로서의 밤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밤(night)은 시간적 개념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인가?

박은하의 최근작 《밤의 황제 Emperor of Night》(2011)에는 ‘밤(nightside)’에 대한 추론을 허용하는 하나의 단서가 내포되어 있다. 전경의 원형 테이블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중년의 남성들 가운데 한 명은 가슴에 부착된 배지로 보아 국회의원임에 틀림이 없다. 검정색이나 곤 색의 양복을 입은 그들 모두가 배지를 부착한 사람과 동일하거나 동등한 신분의 소유자들일 수도 있다. 이미 늦은 밤이지만 그들은 뭔가를 논의하고 있다. 그들이 특별히 ‘어둠(nightside)’의 경계 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클로즈업된 맞은편의 풍광에 의해 드러난다. 그들의 맞은편에는 주변을 백주대낮같이 밝히는 조명에 의해 일렬로 정돈되어 있는 ‘목 없는’ 마네킹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각각의 마네킹들은 화려한 원색의 드레스들을 걸쳤음에도 불구하고, 주체성의 극적인 상실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생기 넘치게 뭔가를-설사 그것이 한낱 술수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라도- 만들어내는 근경의 인물들에 비하자면, 일렬로 도열해 있는 그것들은 이미 비참한 절대타자에 불과할 뿐이다.

한 눈으로도 상황을 통제하는 힘은 검정-이나 곤색-의 제복을 걸친 자들의 몫이다. 그들이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움직일 수도 반응할 수도 없이 그저 일렬로 늘어서 있을 뿐인 마네킹들은 세상이 여전히 희생양을 포식하는 아우슈비츠의 가스실과 다를 바 없음에 대한 ‘그려진 포고서’와도 같아 보인다. 게다가 그것들은 자신들의 수치스러운 타자성을 숨길 수조차 없이 시선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이 빛과 밝음의 영역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어둠의 제국에 비해 희생자의 땅은 늘상 노출되어 있다.

야만적인 문명일수록 노출은 불리하게 작용한다. 노출되는 만큼 (적에 의해)공격받을 개연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약육강식의 공간에서 은폐는 우위를 차지한다는 의미가 된다. 야만의 시대, 어둠의 문명일수록, 어둠, 곧 스스로를 감출 수 있는 ‘특권(?)’은 힘있는 자들의 몫이다. 권력은, 그것이 악의 권력에 가까울수록 은폐의 어둠을 선호한다. 그들은 뒤에서 움직인다. 뒤에 숨어서 규정하고, 심판하고, 가격함으로써 희생을 최대화한다. 반면 노출은 죽음만큼이나 혐오하다. 통상 권력자들은 높은 울타리를 친 구조 안에 들어앉아서, 문을 걸어 잠그고는 그 안 깊숙이에 몸을 숨긴다. 굳이 박은하가 그린《야경,night watch》이 아니더라도, 여의도의 국회의사당 건축양식만큼-양식이랄 것도 없지만- 이 사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예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방패를 든 채 일렬로 도열해 의사당 밖을 지키는 ‘전경’들의 모습과 앞서 언급했던 목 없는 마네킹들의 그것 사이에 차이는 없다. 그-전경-들 역시 호출되었을 뿐인 타자의 집합에 불과하다. 정작 힘의 주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일부의 국민에게 집적되어 있다. 그것이 ‘국민주권’이란 허상 이면의 진실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도가들은 자신들의 주택을 몇 겹의 대문으로 차단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비밀에 붙인다. 이따금 예외적인 폭로자들-위기 리크스 같은- 이 알리는 극히 일부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대경실색할만한 곳이다! 반면, 빈자(貧者)들의 가옥은 그 궁핍함에 비례해 외부에 노출됨으로써, 그만큼 덜 위협적이고 세상과 가깝다. ‘다행스럽게도’ 이들은 세상과 자신을 격리할 어떤 경계도 설정할 힘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그들의 무력(無力)에 의해 세상으로부터 숨거나 도주할 수 없다. 노출된 빈자(貧者)의 극단에 박은하가《해바라기,suntrap》(2011)를 통해 그린 노숙인이 있다. 노숙인 이야말로 완전히 노출된 가장 탈권력적이고 탈소유적인 인간이다. 그는 자신을 시선, 곧 힘으로부터 보호할 최소한의 가림막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그가 어떤 권력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반증이다. 박은하는 《해바라기》를 전시장의 가장 높은 곳, 실제로 채광창의 가장 가까운 곳에 배치함으로써, 이 무(산)계급, 무저항계층에 대한 자신의 경의(敬意)를 표한다. 약자들은 노출되고 사냥된다. 이들은 자신을 숨기는 힘도 기술도 가지지 못했으므로, 그로 인한 온갖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삶을 산다. 그렇다면 예술은? 만일 그 예술로 불리는 것이 진실을 드러내는 자신의 속성에 충실한 한, 그것은 약자의 위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강자의 예술’이란 그 자체로 궤변이자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을 밝히기보다는 감추는 데 재능을 발휘하는 예술이 참담한 비극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늘날 은폐되고 있다.



반보(半步) 뒤로 물러섬


박은하는 세상에 대해 다층적인 관점을 취하고, 포괄적으로 접촉하며 은유나 상징 같은 우회어법을 사용한다. 그의 회화는 세상이 부패하고 타락한 곳으로서 파괴 내지는 소멸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1960년대 쯤의 전위주의자들처럼 발톱을 세우고 달려들어 그 한 쪽에 생채기라도 낼 요량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난 한 세기 동안 숱하게 접해온, 세상에 대해 으르렁대면서 선언서를 남발해온 예술들을 생각해 보시라. 그런 ‘선언서 남발형 예술’의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을 지켜보아 온 사람이라면, 그것이 ‘최소한의 의미에서조차’ 진실한 정신의 보증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 터이다.(그 시대는 대체적으로 거의 모두가 그렇게 했다) 게다가 선언 자체의 딜레마가 있다. 그 딜레마에 의해 선언은 자주 진실을 빼돌리고 단순화고 왜곡한다. 선언이 진실을 담보하지 않듯, 선언의 부재가 진실에 무감각하거나 무지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박은하의 어법이 우회적이고 다소 싱거워 보이더라도, 그것은 자극에 중독된 이 시대의 집단적 지각 차원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이겠다.

박은하의 회화가 선언과 무관해 보이는 것은 세상의 경계로부터 그가 반보(半步) 뒤로 물러서 있음과 관련 있다. 이 ‘반 발 뒤’의 위치는 언젠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ide)가 지적했던 ‘망명자의 딜레마’에 의해 방위적으로 보다 명료해 질 수 있다. 물론 예술가도 망명자라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도 지식인의 모습을 포스트모던 시대의 이방인이라 하지 않았던가. 사이드를 따르면, 망명자의 선박을 좌초시킬 수 있는 두 개의 큰 암초가 있는데, 물신숭배적 나르시시즘과 무조건적인 제휴가 그것이다. “전자는 세상으로부터 그를 소외시키고, 후자는 지적인 신중함과 도덕적 용기를 앗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박은하의 회화에서도 경계인이자 중간자로서 망명자의 불편한 태도가 목격된다. 우선 대중을 박수갈채나 보내는 꼭두각시로 취급하고, 부조리한 세상에서 자신만은 예외라는 식의 거만함을 경계한다는 의미에서, 동시에 유행에의 편승, 관리 가능한 범주로의 투항 등을 통한 어떤 ‘무조건적인 제휴’의 흔적, 곧 외부의 압력에 쉽게 굴하지 않는 의미에서.

박은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혁명가나 혁명적 예술가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질이나 태도의 차원이 아니라, 그가 걱정하는 대상이 어떤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는 데서 기인하는 인식적 차원의 문제인 듯하다. 예컨대 그가 바라보는 문제는 민주주의 정부라거나 복지사회, 부의 불평등한 분배, 우생학적 차별 같은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관계 속에 잠복하는 어떤 집약해내기 어려운 흐름, 사회, 경제, 정치적 차원을 넘어 존재적이고 문명적인 차원들로까지 넘어 나가는 두려울 만큼 유동적(liquid)이고 모호하며 산만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박은하가 추격하다 추격당하고,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재추격을 감행하는 진실이다.



사실성-회화(real-ty – painting), 해석적 재현(interpretative representation)


박은하의 회화에 결정적인 고유성을 부여하는 네 가지의 요인이 있는데, 사실성, 연극적 재구성, 상징성, 서술성이다. 박은하의 모든 작품에는 이러한 요인들이 기본적인 성분이 되어 혼합되고 재구성되면서, 이 시대의 인간이 처한 다양한 드라마와 그 안에 내포된 해석의 결들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사실성(寫實性, real-ty)은 다른 특성들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박은하의 세계에서 가장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주제다. 그가 회화 공간 위에 만들어내는 모든 국면, 상황, 드라마는 사실로부터 출발하고, 마지막까지 사실을 위반하지 않는다. 다른 사실들과 결합하고, 재구성되고, 연출되는 경우에도 그것들은 사실의 지평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때로 사실은 상징에 가담하기도 하지만, 이 경우에도 상징성이 사실성을 억압하는 데 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최소한 그것은 사실적인 동시에 상징적이다. 《문화당서점, used bookstore》을 예로 들어보자. 돌연 1950,60년대를 불러들이는 듯한 그 중고책방의 공시적(synchronic) 속성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그것을 서울의 역사적 서사를 짊어진 상징적 모티브로 고착시킬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나《오르낭의 매장》의 계보에 덥석 붙여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문화당 서점’의 사실성은 ‘대상에 대한 재현의 성실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 이외의 세계와 접점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 의해, 즉 그저 하나의 일화적 풍경으로서의 중고책방이기도 하다는 의미에서의 사실성이다.

박은하의 세계가 쿠르베적 사실주의, 그 절대적인 시지각우선주의의 강령과 무관하다는 것은《해바라기,suntrap》같은 작품에서 판명하게 입증된다. 여기서는 사실성과 방법적 추상성, 의미론적 상징성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그 노숙인은 그가 실제로 마주했던 구체적 인물이다.(사실성) 사건으로서의 노숙은 사람들을 거리로 추방하는-반면 어떤 사람들은 수십, 수백 채의 사옥을 ‘재산’으로서 소유하고 있다-이 시대의 잔혹사, 부조리한 실존의 상징적 단면이다. 노숙인은 약자, 박탈당한 자, 유기된 자의 상징이다.(상징성) 작가가 실제로 마주치기도 했었던 실존인물인 노숙인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함으로써, 소유에 미친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치료제가 된다. 작가는 ‘소유의 사회(society of possession)’의 해독제인 그(들)에게 밝고 희망적으로 물결치는 하늘을 선사한다. 그 하늘은 더 이상 시각적으로 재현된 하늘이 아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명백한 추상이다.

박은하가 추구하는 사실성 회화는 경직된 형식주의로서의 사실주의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만큼이나 신표현주의자들의 사실주의(neo-expressionist’s realism)와도 구분된다. 예를 들어《청년,youth》같은 작품을 보자. 이는 각각 별개인 여러 상황들을 이미지 콜라주의 방식을 빌어 연출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전통적 의미의 재현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현시대, 사회적 상황에 대한 보다 적요한 재현이 된다. 이는 그 안에 해석적 기능을 담지함으로써 오히려 재현미학의 임무에 대한 일보 진전된 수행의 방식으로서, ‘해석적 재현(interpretative representation)’, 또는 ‘기능적 재현(functional representation)이라 이를 만하다.

이는 지난 196,70년대 이후 중요하게 부각되었던 신표현주의적 사실주의, 곧 사실을 재현하되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분출을 절제하지 않는 재현인 ‘감정적 재현(emotional representation)에 의존적인 신표현주의적 사실주의와 흥미로운 변별점을 설정해낸다. 독일의 신표현주의 이후의 3,40년 동안 이 감정적 재현에 의한 사실의 추구가 매우 특권을 누려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는 동안 격앙된 감정과 그 직접분출에 선택과 결정을 위임하는 태도와 우연과 임의성, 즉흥성과 예측불가성을 표현의 상위서열에 올려놓으려는 미적 노선이 지지되어 왔음 또한 물론이다. 이러한 흐름이 제도권 미술사에 유입되고 주류로 자리매김 되면서 과도하거나 설익고 어설픈 언어들에까지 주관과 진솔한 감정의 지위를 허용하는 미적, 도덕적 정당성이 남발되었다. 통제력을 상실한 감정의 분출이 마치 더할 나위 없는 저항미학의 성과나 되는 것처럼 포장되었고, 미숙한 언어, 무작위적이고 무질서한 색, 형태와 구성의 남용, 분기탱천의 토로, 해석의 부재가 해방 미학의 소산으로 봉헌되기도 했다. 주관과 감정의 이름이라면 어떤 무작위적인 행위나 제스처라도 진지한 사유의 과정과 그 더딘 실현을 대신해도 된다는 호도가 되풀이 되었고, 심지어는 그러한 표현이야말로 결함과 결핍을 가지고 있는 현실을 표현하기 위한 가장 탁월한 재현의 방식으로 정의되기도 했다.

박은하의 회화는 다른 재현미학의 가능성을 위한 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앞서 ‘해석적 재현’이라 했던 작가의 재현방식은 전통적인 시지각적 재현과 감정적 재현의 요소를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진지하게 반성하고 성찰한다.

무엇보다 박은하의 ‘사실성 회화’가 의미로운 것은 그 사실의 촉을 부단히 인간에 맞추려는 시도 때문이다. 언젠가 오웰(George Orwell)은 매스미디어가 인간을 노예화하고 말거라는 탁월한 예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사실 무언가를 약탈하고 노예화할 수 있는 주체는 인간 밖에 없다. 미디어는 인간으로부터 아무 것도 박탈할 수 없다. 인간만이 인간을 짓밟고, 억압하고, 소외시키고, 두렵게 하고 유기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향해 스스로를 열고 늘 인식할 수 있는 존재 또한 인간일 뿐이다. 그리고 “인간을 향해 스스로를 열 때 그의 영혼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

박은하가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세상은 약탈의 드라마들로 차고 넘친다. 그렇기에 인간을 향해 스스로를 여는 것이 예술의 특권이자 소명이라는 사실이 반드시 환기되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