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이선영

2010.10
탈주하면서 생성하기

박은하 전 | 3.11--8.27, 세오 갤러리
이승현 전 | 7.22--8.29, 갤러리 잔다리


갤러리로 연결된 지하통로 벽면에 그려진 박은하의 벽화와 미술사의 명화들을 변조하여 이색 미술관을 연출한 이승현의 작품들은 구불거리는 불확정적인 선의 흐름을 통해 확실한 형태와 형식을 와해시키려는 충동이 지배적이다. 그들의 작품에서 일상과 역사 속에서 확실한 자리와 위치를 배정받은 형태와 형식들은 모종의 힘에 의해 내부로부터 해체되며 어디론가 흘러간다. 각자 출발한 점은 명료하지만 종착점은 모호하다. 그러나 이들이 확실성을 불확실성으로 변모시키는 이유가 탈주를 위한 것임은 분명하다. 고정된 시공간으로부터 미지의 대지를 향하는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 그 여정의 일차적인 단계는 변형이며, 작품은 변형이 일어나고 전개되는 장이다. 일상으로부터 출발하는 박은하의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을 찍어낸 특수 사진처럼 인간과 사물에서 풍겨 나오는 아우라와 물신적 기운이 얽히고설켜 있다. 이승현은 미학과 미술사의 규범이나 교양에 의해 짜여진 명화라는 대상의 날실과 씨실을 모두 풀어헤쳐 기이한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이들의 작품에서 기존의 형태와 형식으로부터 풀려나온 선들은 분열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방향과 속도로 흘러간다. 정처 없는 여행이나 유목과 비교될 수 있는 이들의 작품은 닫힘에서 열림으로 향하는 과정에 놓여 있다. 그들에게서 고정된 점이나 직선적 요소는 발견되지 않으며, 예측 불가능한 변이가 일어나는 도약지점들이 다수 포진해 있을 뿐이다.

현대적 일상이 사각 캔버스 같은 격자형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면, 사각 캔버스라는 경계를 범람하려는 선들로 가득한 박은하의 그림들은 환경으로 확장되려는 잠재력이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 그녀는 지하로 연결된 좁은 통로를 검게 칠하고 그 위에 푸른색과 보라색을 주조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두 남자를 그렸다. 위, 아니면 아래라는 하나의 방향만을 선택하게 되어 있는 막장 같은 상황에서, 자연광과 인공조명을 통해 드러나는 형태와 선의 흐름은 정장차림의 배불뚝이 남자와 초라한 행색의 마른 남자를 한 쌍의 상징으로 부각시킨다. 작가는 장소의 특수성을 살려서, 건축적 구조를 상징적 차원으로 전이시키며 서로 멀어지는 두 부류의 인간을 전형적 상황으로 배치한다. 밝은 위쪽을 향하는 남자와 어두운 아래쪽을 향하는 남자, 더구나 갤러리의 이전 때문에 굳게 닫혀 있는 아래층을 향하는 남자는 출구 없는 어두운 터널로 추락하는 다수의 삶을 반영하는 것 같아 더욱 우울하다. 각각의 인간에게서 흘러나오는 선들의 얽힘은 양 계급이 분리되는 속도와 방향을 가늠하게 한다. 자본과 노동이 교환되는 시장이 유일한 보편성으로 군림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 연결망들을 통해 권력이 작동된다. 이 연결망의 말단은 천국과 지옥처럼 그 명암이 분명하지만, 연결망 자체는 명확하게 구조화되어 있지는 않다. 이 불확정적인 그물망은 자본주의에 나름의 역동성을 부여한다.

두 도상을 연결시키는 복잡한 선의 흐름은 계급적 차이를 늘릴 수도 줄일 수도 있는 신축성을 가진다. 존재의 가장자리로부터 풀려나온 선들은 꼬이고 꼬인 권력의 그물망을 연상시키면서도 명확한 위계질서를 위협하는 힘으로 보이기도 한다. 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이 폐쇄적 상황의 유일한 희망은 공간을 타고 흐르는 선이다. 그것은 단지 카오스에서 시작되어 카오스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상황을 무한의 가능성으로 도약시키기 때문이다. 직립 보행을 통해 이미 대지로부터 탈영토화 된 인간의 손은 떠도는 선의 한 가닥을 부여잡고 역전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이 벽화에서 선들의 맡은 역할은 변모이다. 선의 흐름에 내포된 변모의 가능성은 양극화로 치닫는 계급적 질서를 혼란시킨다. 혼란은 누군가에게는 희망일 수 있다. 선의 소용돌이 속에 내포된 또 다른 소용돌이, 주름 속에 내포된 또 다른 주름은 유동성을 극대화하며 경직된 구조를 위협하는 생성의 힘이다. 고정된 구조로부터 탈주하고 새로운 대지를 생성하려는 예술의 경향은 자본의 힘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사회적 움직임과 만날 수 있다. 해방은 한 방향으로의 집중이 아니라 집중의 와해이며, 정해진 목표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표류와 탈주는 구별되지 않는다. 선의 흐름은 욕망의 흐름이기도 하다. 박은하의 캔버스 작품에서 욕망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기계, 기계와 기계 사이를 흘러 다녔다면, 이번 벽화는 총체적인 환경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중략-

■이선영

출전 | 아트 인 컬처 2010년 8월호

2010, 김미진

달리는 욕망의 주체들: 매일 매일 실패하는 GET AWAY!

● 박은하의 회화는 현대인들의 일상생활에 침투된 여러 가지 상황을 그려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PC방에 앉아 컴퓨터에 열중하며 빨려 들어가는 모습, 지하철이란 기계에 접속되어 앉아 있는 사람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녀가 그린 일상의 공간은 사실적 표현 위에 기계와 욕망의 기호들과의 상호관계 속에 흐르는 현상의 추상적 표현이 함께 들어가 있다. 그녀는 파스텔조의 색과 선을 사용하며 사물이나 사람이 있는 현실의 공간을 그리고 그들로 부터 빠져나오거나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기운을 유동적 형태로 등고선처럼 그려낸다. 그것은 화면을 떠돌아다니거나 서로 접속되어 있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박은하는 근원적으로 인간존재론적 의미에서의 환경에 지배를 받는 관념적인 것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도처에 편리한 환경을 위해 인간 스스로가 만든 기계와의 유기적관계안에서 심리적 상황도 보여준다.

이번의 박은하의 세오갤러리 월 페인팅은 외부바깥에서부터 내부갤러리로 연결되는 공간을 모두 검게 칠하고 청색 파스텔톤을 주색조로 하는 선을 사용하여 앞을 향해 달려가는 두 남자를 그려내고 있다. 한 사람은 회사사장인 듯 양복 속의 풍만한 몸매를 드러내며 앞만 보고 달려가고 그와 반대방향에서 흰색의 짦은 셔츠와 바지를 입고 마른 몸매의 남자가 달려간다. 실제 계단과 비스듬한 벽을 이용해 달리는 양복맨의 표현은 더욱 실감이 난다. 그는 현재의 순간에서 더 나은 것을 향해 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는 여전히 예측할 수 없다. 그가 뛰면 뛸수록 벽면 코너를 이용해 표현한 반대방향으로 달리는 사람과는 더 많은 간격을 만들어낸다. 박은하는 사장과 직원, 사업가와 지식인처럼 보이는 두 인물에서 이시대의 서로 다른 직업의 계층을 상징한다. 서로가 추구하는 다른 가치관은 배경에서 보여주는 것 같은 불확실한 등고선들을 많이 생산해 낸다. 이들이 추구하며 잡고자 하는 실체는 해체되며 어디로 가는 것이 옳은지 혼돈에 빠져들게 한다.

그들은 더 나은 것이라는 욕망, 욕구, 현실탈피의 개념에 따라 달리고 있지만 그 결과는 결국 계속되는 현실속의 하나의 흐름일 뿐이다. 전 공간을 검은색을 배경으로 칠한 것과 푸른색, 보라색의 주조색들이 그 흐름의 징조들을 상징하고 있다. 수많은 사물들과 정신적 산유물을 쏟아내고 있는 현재에서 우리들이 어떠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도 곧 공허함의 주체가 됨을 보여준다. 박은하는 기계와 욕망에 접속되면서 마력적 기운의 소용돌이를 생산하는 이 시대의 인물과 풍경을 독창적으로 그려내는 기대되는 젊은 작가라 여긴다. ■ 김미진

2008, 김준기

시스템을 연성화하는 유기체의 사유와 감성 : 박은하에 대한 독해와 질문
김준기 (미술평론가, http://www.gimjungi.net/)


박은하는 시스템이 직조해내는 공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박은하의 회화작품에 등장하는 플라나리아는 그 공간을 유영하면서 시스템과 그 바깥의 이분법적인 이항대립 구조를 생성한다. 박은하는 사유와 직관을 동반 관계에 놓고 있다. 구조와 개인, 시스템과 판타지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방식에 있어서 그는 이성적 사유와 감성적 표현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앞세우지 않고 병행하도록 하고 있다. 사무실 공간은 박은하가 생각하는 시스템의 공간을 가장 잘 대변하는 공간이다. 딱딱하게 구조화한 시스템을 파고드는 플라나리아의 부드러움은 이 작가가 시스템을 공격하는 인식론과 감성학을 대변하는 하나의 아이콘이다. 박은하의 회화는 구조화한 공간과 그 공간을 연성화하는 패턴의 유영이 대결하면서 동시에 공존하는 세계이다.

그는 구조와 개인의 관계를 재해석하는 탈현대의 사회학을 담고 있다.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구조의 견고함과 그 속으로 파고드는 박은하 패턴의 유연함은 그가 시스템에 대한 관심을 풀어나가는 실마리이다. 그는 자신의 패턴을 플라나리아로 설정한다. 플라나리아는 시스템에 저항하는 예술가 주체의 자아를 대변하는 유기체이다. 유성생식과 무성생식을 공유하는 자웅동체로서 자생력이 매우 강한 플라나리아는 박은하 예술가 주체의 감성과 사유를 대변하는 분신이다. 그는 구조와 개인, 시스템과 인간의 이항대립을 공간과 플라나리아로 치환한다. 그는 플라나리아를 통해서 무기물의 세계를 연성화하는 유기체로서의 예술가를 꿈꾸고 있다. 박은하의 플라나리아는 구조를 파고드는 개인이며, 안정을 파괴하는 불안이자, 사회를 견제하는 예술이다.

국내외 지인들의 작업실인 카페공간을 통해서 그는 동시대의 공간 풍경들이 국경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질서나 정서를 만들어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플라나리아는 어느 곳 하나 예외 없이 존재하는 빡빡한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판타지이다. 공간을 휘돌며 곡선과 색채를 드리우며 일정한 규칙이 아니라 유동적인 불규칙을 양산하고 다니는 플라나리아는 작가의 판타지를 실현하는 대리주체로 작동한다. 그것은 일상의 메커니즘으로부터 탈출하고자하는 일탈의 꿈을 담고 있다.

스타일의 묘미를 캐내는 일도 중요하다. 기표와 기의의 연동을 이끌어내는 일과 더불어 실재와 의미작용의 구체성을 찾아내기 위해서 그는 장면과 상황을 설정하고 그것을 표현해내는 방법론, 즉 스타일의 문제에 매우 신중하면서도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박은하의 플라나리아는 서사적이기 이전에 심미적이다. 플라나리아는 박은하 스타일을 견인하는 하나의 패턴이다. 그의 플라나리아는 마블링 패턴에서 나왔다. 그것은 화려한 색채를 가진 대리석 무늬(marble pattern)이다. 플라나리아는 매우 감각적인 선과 색의 운율로 이루어진 시각적 장치물 그 자체로도 매우 커다란 비중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문양이 그림을 그리는 화가인 박은하에게 매우 흥미로운 과정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대학시절의 드로잉들이 판타지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점도 그러하거니와 그것이 머리카락이나 물결 무늬, 또는 마블링과 드로잉의 결합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작업 메모에서  알 수 있듯이 애초에 그는 사무실 공간과 자신의 플라나리아가 일탈의 관점에서 공존하면서 시각적인 조화를 이루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플라나리아는 실내 공간의 식물 이미지를 잠식하기도 한다. 인물이 부재한 공간에서 인물의 등장하는 공간으로 변화해 나간 그의 공간 작업은 공간의 구석구석은 물론 인물과 상호 작용을 통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는 데로 진화했다.

이러한 작업은 사물 자체에 마블링 패턴을 입히는 그림으로 나아갔다. 테이블이며 의자, 스텐드 안경 등 화려한 마블링 패턴의 옷을 입은 사물은 그 자체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으며 공간과 사물의 돌연변이가 만들어내는 화면의 스펙터클은 그 자체로 회화적 상상력을 발현한다. 그는 캔버스 안의 플라나리아를 전시장 바깥 공간으로 확장하기도 했다. 작업실에서 완성한 캔버스 그림과 전시장에서의 월-페인팅을 결합한 작업으로 그는 자신의 플라나리아를 더욱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동시에 자신이 의도하는 일상 공간으로부터의 일탈이라는 이슈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최근에 나타나는 플라나리아의 보다 다이내믹한 형태와 색채들은 공간을 감싸고 도는 마블링 패턴의 심미성이 절정에 도달했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 박은하는 자신의 패턴을 인물 작업에 대입하고 있다. 는 PC방에 앉아서 컴퓨터와 1:1 커뮤니케이션 중인 일곱 사람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PC방 칸막이의 반복되는 구조와 그 앞에 앉은 인물들이 비정형의 마블링 패턴으로 녹아서 컴퓨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이미지의 변형은 현대사회의 단면을 그려내는 데 있어서 박은하의 플라나리아가 매우 유효한 스타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해준다. 스타일의 독창성을 탁월한 의미작용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작품이다. 이 작품에 이르러 박은하는 득의(得義)를 획득했다. 가장 최근작인 인물 그림 은 플라나리아의 향배를 가늠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상의 간략한 독해를 전제로 다음의 몇 가지 토론 거리를 던진다.

1.
박은하의 스타일과 그의 내러티브는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의미작용을 남기고 있는가? 만약 박은하가 설정한 장면이나 상황이 플라나리아라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요즘 작가들이 지루하게 반복하고 있는 일상담론에 포박된 채 그 이상의 의미를 생산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면 플라나리아라는 박은하의 스타일은 무의미한 일상담론의 한계를 벗어나 일탈의 담론으로 나아가는 데에 있어 결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과연 박은하의 플라나리아는 마블링 패턴이라는 조형적 장치 이상의 의미생산을 결과하고 있는지 따져볼 문제다.
2.
총체성을 상실한 시대, 미시적 서사의 창궐. 1990년대 중후반 이후의 한국현대미술을 가장 포괄적으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들이다. 거대 서사의 난망함을 익히 경험한 바, 우리는 미시 서사를 통해서 현실을 읽어내는 새로운 길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난무하는 일상담론은 밋밋하고 수평적인 나열과 상투적인 재현을 반복하고 있다. 박은하의 작업은 이러한 현실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우리 시대의 예술은 이 지루한 여정의 한가운데서 어떤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대볼 일이다.
3.
박은하의 공간과 구조와 인물과 대상에는 특정성이 결여해있다. 박은하는 익명화한 지인의 공간이나 익명의 현대인들의 공간을 회화적 재현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박은하가 그려내는 공간과 패턴이 환기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명쾌한 전략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특정 인물의 특정 공간이 우리에게 일상과 일탈의 경계에서 어떤 내러티브를 전달하고 있는지가 보다 명확하게 다가설 수는 없는지, 혹은 그 특정성을 완전히 소멸시킴으로써 또 다른 효과를 가져올 수는 없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나아가 장소 특정성을 넘어 의제 특정성을 획득하는 길은 없겠는지 작가와 여느 패널들의 생각이 궁금하다.